지난 2월12일. 시사저널 기자들의 ‘편집권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창 뜨거울 무렵, 고재열(32·사진) 기자는 선후배 기자들과 함께 묶어낸 책 <기자로 산다는 것>에 엉뚱한 자기소개서를 썼다.

“파업으로 인해 생계가 어려워지자 퀴즈 프로그램 상금 한 탕을 노리고 퀴즈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4월3일, 약속은 현실이 됐다. 그는 KBS 1TV <퀴즈 대한민국>에 출연해 ‘퀴즈영웅’에 이름을 올렸다. 고 기자의 퀴즈영웅 등극은 오는 15일 방송된다.

   
   
 
지난 3일 녹화 당일, 현장에는 시사저널 기자들과 고 기자의 가족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최종 3라운드 상대를 물리치고 퀴즈영웅 자리에 도전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500·1000·2000만원 문제 중 3번의 기회에 도전해 2000만원에 도달하면 승자가 되는 게임에서 그가 1000만원 두 문제의 답을 연달아 맞히자 스튜디오에는 환호성이 터졌다. 사회자가 퀴즈영웅이 된 소감을 묻자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시사저널 파업기자입니다. 파업을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월급 때문인 줄 알지만 기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닌 편집권입니다. 저를 비롯한 시사저널 기자들은 기자로서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고자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의 발언이 방송에 나갈지는 불투명하지만 고 기자의 퀴즈영웅 등극 소식은 오랜 파업으로 지쳐있던 시사저널 선후배 사이에서 청량제 같은 자극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시사저널 노조사무실에서 이 소식은 최고의 화제다.

평소와 다름없이 파업투쟁일정을 챙기고 있던 고 기자는 퀴즈영웅 얘기를 꺼내자 무척 쑥스러워했다. 그는 “퀴즈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면 창피했을 것 같은데 퀴즈영웅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벼락치기’를 했다는 그는 몇 주 동안 집중적으로 살펴 본 시사상식 서적과 금창태 시사저널 사장이 ‘퀴즈영웅’ 비결이라고 밝혔다. 평소에도 뼈있는 농담을 잘 던지는 그는 “파업으로 대립하고 있는 경영진이 해당 프로그램을 볼 거라고 생각하니 허투루 문제를 풀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또 이번 일로 아내에게 파업 3개월 동안 월급을 가져다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게 됐다. 그는 상금 2000만원 중 절반은 파업 투쟁기금으로, 나머지 반은 아내에게 가져다 줄 생각이다. 고 기자는 퀴즈영웅 다음 목표를 드라마작가 등단으로 정했다. 시사저널 기자 이전부터 가져왔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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