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세에 무슨 한가로운 영화타령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대부 3>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패밀리 보스가 된 마이클(알 파치노)이 살인·탈세 혐의로 의회 청문회에 소환된다. 보스의 개인적인 불명예나 구속은 물론이고 패밀리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청문회는 마이클 조직 전 중간 보스의 신병을 확보, 마이클의 유죄를 입증할 증언을 폭로하도록 해놨다.

그런데 막상 청문회가 열리자 상황은 전혀 엉뚱하게 펼쳐진다. 마이클이 중간보스의 아버지를 고향 이탈리아에서 ‘긴급 공수’ 하듯 데리고 와 청중석에 앉힌 것이다. 마이클의 범죄 사실을 폭로해야 할 중간보스의 입이 얼어붙는다. 자기가 증언하면 그의 아버지가 무사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 청문회장은 일순 소란과 침묵이 교차하고 위원들은 우왕좌왕한다.

청문회 위원장이 “도대체 저 노인이 누구길래 증언을 못하겠다는 것이냐”고 묻지만 갱들의 법칙과 질서 앞에 정치권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청문회는 유야무야 끝나고 마이클은 유유히 의사당을 나선다.
한보 청문회로 말들이 많다. “의원들이 형편없다” “청문회에 조사권을 줘야한다” “특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증인에 구걸하는 의원에 서글픔도

물론 이번 청문회는 ‘광주·5공 비리 청문회’와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래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나오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청문회는 아직까지는 진실 규명은 물론, 대중들의 ‘정치적 카타르시스’ 욕구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문회 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는 것 아닌가.

고작 검찰에서의 진술이나 확인하려 용을 쓴다거나 -그나마 그것도 못 알아내기 일쑤지만- 아예 증인에게 “제발 우리 국회의원들 처지를 고려해서 한 건 건지게 해달라”고 구걸하는 의원을 보면 한심함을 넘어 서글퍼진다.

‘광주 청문회’ 때를 한번 생각해 보자.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공식적으로는 말 한번 제대로 못하던 것들을 카메라 앞에 앉혀 놓고 조목조목 따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중은 가슴속 응어리의 일부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몇 의원의 매서운 질문은 적어도 사태의 본질이 어디에 있으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지는 드러냈다.

광주 청문회가 역사앞에 충분치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나마 일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상당수 청문회 위원들이 증인들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물론 한보 청문회가 워낙 형편없기에 반사 이익을 얻고 있는 점도 있다)

도덕적 우위는 ‘권위’를 가져다 준다. 물론 법적으로야 청문회 위원은 권한(신문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린 돈’이나 기타 정치적 의혹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거나, 꼭 그렇지는 않다 해도 같은 당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인을 비호하는 의원들에게 법적인 권한 이상으로 증인을 압도하는 권위를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격일 것이다. 그런 청문회에 정치적 카타르시스를 바랐다는 것이 애시당초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카타르시스가 없다”

한보 청문회는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래왔다. 그러나 위원들의 무능이나 권위없음만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밉든 곱든 아직은 국민의 대표권을 위임받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야 할 사람들이지 않은가.

25일에는 김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증인석에 앉는다. 한보 청문회의 최대 하이라이트이자 여지껏의 부진을 만회할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의원들은 증인이 착석하면 한결같이 “TV로 생중계되고 있고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라고 근엄하게 꾸짖고 시작한다. 똑같은 말을 그들 의원들에게 하고 싶다. 의제를 ‘한보’건에만 국한시켜야 한다느니, 국정 농단등 현철씨에 얽힌 의혹을 다뤄야 한다느니 하는 옥신각신 풍경이 연출되다가 결국 시간에 쫓겨 흐지부지 되지나 않을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다시 영화 장면 하나 더. 법정물의 수작으로 꼽히는 <어 풋 굿맨>의 마지막 대목이 떠 오른다. 패기에 찬 신출내기 검사(톰 크루즈)는 기고만장하고 뻔뻔한 증인(잭 니콜슨)을 꼼짝달싹 못하게 추궁, 실토를 받아내고 급기야 법정 구속까지 시키기에 이른다. 청문회 위원들에게 두 편의 비디오를 한 번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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