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 보도를 보면 청와대가 전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분위기다. 방송사 노조가 주장하던 ‘방송 독립’이 이뤄진 것도 아닌데 권력 심장부의 ‘환부’가 거리낌없이 보도되고 있다.
지난 3월21일 오전 검찰에선 한보그룹이 독일의 철강회사 SMS사로부터 철강설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2천억원을 조성, 김현철씨측에 리베이트로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내용이 YTN을 통해 보도되자 갑자기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바빠졌다. 강인섭 정무수석은 즉각 KBS, MBC, SBS등 방송3사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2천억 리베이트설을 작게 다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수석의 요청과는 반대로 방송 3사는 ‘2천억 리베이트설’을 일제히 9시 뉴스 머릿기사로 올렸다. 방송 3사는 다음날인 22일에도 검찰이 ‘2천억 리베이트설’에 대한 본격수사에 나섰다는 내용을 머릿기사로 내보냈다.

이를 두고 정가와 방송가에선 “과거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 정부의 파워가 건재하던 한보사건 이전까지만해도 방송사가 청와대의 요구를 외면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권력핵심에 불리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방송사 보도국장실엔 어김없이 이원종 당시 정무수석의 전화가 걸려왔고 이수석의 한마디는 곧바로 뉴스에 반영됐다.

그러던 방송사들이 이젠 청와대의 요구를 묵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와대와 방송사의 관계가 이렇게 급변하게 된 데는 방송사 내적인 변화보다 한보사태와 현철씨 문제로 일격을 당한 김영삼 정부의 권력 진공상태가 더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권력의 진공상태가 방송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이수석의 경질에서 그 원인을 찾는 시각도 적지 않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최근 김대통령이 이수석을 경질한 데 대해 상당히 아쉬워 하는 눈치”라며 “보도에 문제가 있어도 언론사에 전화를 걸 사람도 없고 전화를 해도 반영이 안된다”고 털어놓았다.

김대통령의 심중을 제때제때 파악해 언론과의 관계를 풀어나갈 사람이 없다보니 정치부가 사회부처럼 기사를 쓰는 현상이 빚어진다는 주장이다. 지난 개각 당시 동아일보 출신인 강수석이 조선일보 출신인 김용태 비서실장과 함께 청와대로 입성하자 세간에선 청와대 비서실의 새 진용이 ‘임기말 언론플레이용’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는 지금 언론 관리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누수가 가속화되고 있는 청와대의 통제력 회복은 요원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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