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조선일보에 원수진 일이 있느냔다. 왜 그렇게 조선일보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냔다. 사람들 말이 그렇다. 하긴, 언론의 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엔 수년째 조선일보를 물고 늘어지면서 그 잘잘못을 따지는 내 태도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어쩔 땐 나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나는 왜 조선일보를 비판하는가? 노무현 정부의 레임덕과 더불어 '안티조선'의 열기도 점차 시들어가는 마당에 나는 어쩌자고 대책없이 조선일보를 계속 붙들고 있는가? 누구처럼 조선일보 보도에 당한 적도, 개인적으로 원한 가질 일도 전혀 없는데, 왜 이처럼 미련하게 아둔하게 답답하게 조선일보를 놓지 못하고 있는가?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분노. 그렇다. 잘못된 언론에 대한 분노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는 뻔뻔한 언론에 대한 분노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고 같은 잘못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뻔뻔한 언론에 대한 분노다. 아니, 보다 적확히 말하면, 언론의 탈을 쓰고서 언론을 욕보이는 짓을 마다하지 않는 언론 같지 않은 언론에 대한 분노다.
 
강준만 교수는 전에 쓴 책에서 "분노해야 할 때 왜 분노하지 않는가?"고 도발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이 땅의 가장 큰 문제라고 일갈했다. 나의 분노는 정확히 그 지점에 위치해 있다. '분노의 사회학'을 설파한 강 교수 자신은 정작 예전의 분노에서 많이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러나 나의 분노는 아직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다. 분노를 촉발시킨 대상이 아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싸운다. 해가 떨어지건 말건, 날이 저물건 말건, 남이 알아주건 말건, 대책없이 미련하게 아둔하게 답답하게 주먹을 휘두른다. 분노를 잃어버린 사회를 향해서. 큰 목소리에 잠겨 시시비비를 잃어버린 사회를 향해서. 조선일보의 마술에 휘둘려 참과 거짓의 경계조차 망각해 버린 사회를 향해서.

   
  ▲ 조선일보 11월 18일자 사설  
 
각설하고, 18일자 조선일보 사설 <김국방장관 후보의 상식, 이통일 후보의 비상식>을 보자. 국방장관 후보와 통일부 장관 후보를 '상식'과 '비상식'으로 대립.대결시키는 제목에서부터 사설의 의도가 물씬 풍겨난다. 그러면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비상식이라는 걸까?
 
사설에 따르면, 남북간 전력균형 문제에서, 전시 작전통제권 단독 행사 문제에서, 한반도 전쟁 위협 세력을 꼽는 문제에서, 그리고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문제에서 노 대통령과 현 정부의 인식과 정반대되는 것들은 죄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상식"이다. 노 대통령에 의해 신임 국방장관으로 지명된 김장수 후보는 이 모양 조선일보판 상식을 대변한다.
 
반대로, '6·25가 남침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신중한 답변을 하고,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에 대해 "과거엔 기권했지만 이번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나와서 찬성하기로 했다"고 말하는 등, "온통 생각이 거꾸로 박힌 사람들로 채워진" 현 정부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하는 이재정 통일부 장관 후보는 '비정상'의 대변자다. 조선일보식 구분이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일보가 무엇을 정상이라 하고, 무엇을 비정상이라 규정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상, 의견 제시는 자유고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 물론 조선일보 사설의 내용에 나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시비할 생각은 전혀 없다. 사실에 어긋나면 모를까,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판한다는 건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옳지 않은 짓"이니까.
 
민주주의가 뭔가? 나와 다른 의견을 용인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틀렸다'고 단죄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몰고 가는 사회는 전제주의다. 전제주의에서는 정답과 오답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자의 생각에 근접할수록 정답으로 처리되고, 거기서 멀어질 수록 오답으로 처리된다.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을 예리하게 구분하여 나와 다른 의견을 미친 짓으로 매도하는 것도 그런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다시 조선일보 사설로 돌아가자. 나는 왜 '나의 안티조선'을 변명하면서 이 사설을 예로 들었는가? 간단하다. 이 사설에 조선일보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내용 여하를 떠나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상식'이요 '정상'이라 대접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비상식'이요 '비정상'이라 손쉽게 단죄하는 전제주의적 발상. 이것을 보고도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 한 마디에서 '상식'과 '비상식'을 가르고, 대답 하나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판가름하는 것은 정신병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짓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 아닌 다음에야 대체 어느 누가 각인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이는 조선일보가 스스로 이념의 재판관으로 자처했던 7~80년대의 기억에서 아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다.
 
조선일보는 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견해, 다른 접근 방식을 결코 사악하게 보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이념과 정신은 다양할 수 있으며 다양한 견해가 각각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하며 존재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다. 조선일보는... 우리 주장과 다른 것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려는 식의 독단과 독선을 배척한다" 운운.(사설, <조선일보의 정도>, 2002.3.5)
 
이 사설을 쓴 때로부터 5년이 채 안돼 분명히 밝혀진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첫째, 조선일보는 '똘레랑스'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앵똘레랑스' 그 자체라는 것. 나아가 창간기념 사설에서까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이비 언론사라는 것. 조선일보가 말 그대로 똘레랑스를 주창하는 신문이라면, 그리고 진실로 독자를 두려워 하는 언론이라면, 대한민국을 상식과 비상식, 정상과 비정상으로 편가르는 이아고의 목소리를 같은 지면에 담을 수는 없을 터다.
 
그렇기로 나는 조선일보에 원수진 일도 없고 개인적인 피해를 당한 적도 없지만, 조선일보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작업을 차마 그만 둘 수가 없다. 전제주의적 사고를 강요하는 그릇된 언론에 의해 민주주의의 맑은 공기가 오염될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며, 또한 앞말 뒷말이 따로 노는 사이비언론에 의해 참언론을 지향하는 몸부림들이 덩달아 매도될까 저어하는 까닭이다.
 
인적은 드물고 노을은 깊어만 가는데, 안티조선의 펜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답답한 내 심정을 오자서의 탄식으로 갈음한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멀구나."

문한별 / 언론인권센터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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