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에 닥친 ‘세기말’을, 구태여 종교적 종말론과 연결지을 필요는 없다. 단순한 시대의 구획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집할 나위도 없다. ‘세기말’의 어둠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 어둠과 현상은 바로 지나가는 세기가 쌓아온 난제들의 반영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세계화’로 더욱 촉발된 무차별 무한경쟁의 ‘밀림’ 자본주의는 더더욱 조장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다운 공동체의 질서로 가다듬어져야 하는가. 죽어가는 생명의 사슬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추구되는 성장은 언제까지나 지속가능한 것인가. 장밋빛으로만 노래되는 정보화사회가 새롭게 자아낼 격차와 소외의 주름살은 또 어떻게 다스려낼 것인가. 인간이 풀어야 할 난제들을 이루다 헤아리기는 어렵다.

따라서 ‘세기말’은 스스로 그 어둠을 뚫고 ‘신세기’의 출구를 찾아내야 한다는 상징의 반어이기도 하다. 출구라는 낱말을 전망이거나 대안으로 바꾸어 말하더라도 무방하다. 그것이 세계가 마주친 ‘신세기’의 과제이며, 또한 넓은 뜻에서의 한국사회, 그 속에 살아가는 겨레의 과제이다.

굳이 수구와 보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만한 무게의 과제를, 수십년동안의 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치인 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그들만으로는 모자라다. 다시 한번 굳이 개혁이거나 진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색다르거나 새로운 전망과 대안의 수혈이 요구될 수 밖에 없는 계제이다.

나는 그 수혈의 일단을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의 등장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시기의 적합성이나 정책의 ‘정밀성’에 더러는 의문과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제시하는 정책대안들은 비록 다듬어지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신세기’가 요구하는 출구모색의 지평을 분명히 넓혀주었다는 사실마저 부인해버릴 수는 없다.

이를테면 ‘사회적 시장론’이나 재벌체제의 해체론은 어느 후보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목소리이다. 사회보장의 획기적 확충, 주한 미군기지의 임대료 징수, 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포함하는 원전건설 반대 등도 괄목할만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땅의 거대 미디어들은 입을 맞춘듯이 그와 그의 주장을 묵살한다. 때문에 어떤 한쪽 구석에서 “언론의 권영길 후보 피해가기” 또는 “국민승리21의 기자실에는 기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푸념이 활자로 찍혀나온다. 한마디로 참담한 현실이다. 물론 이땅의 거대 미디어들이 그의 주장을 이해하거나 찬성하기를 강요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더욱 다듬어져야 하고 검증돼야 한다. 다듬질은 마땅히 그와 ‘국민승리21’의 몫이다. 그러나 검증은 누구의 몫인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언론의 몫이며 또한 이땅의 오늘과 내일을 가름할 주권자의 몫이다.

다시 한번 입을 맞춘듯이, 이땅의 거대 미디어들은 그 까닭을 원내 교섭단체와 여론조사 지지율의 기준으로 변해한다. 그러나 그따위 산술적 기준, 또는 양적 기준만이 기준일수는 없다. 구태여 말하자면 질적 기준도 가세되어야 한다.

비록 여론조사 지지율에선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권영길 후보, 그는 이땅에 엄존하는 한 계층의 대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세기말’과 ‘신세기’의 논리로 돌아간다면, 그는 출구의 지평을 넓히는 이른바 진보의 대표선수이다.

그는 분명히 한 색깔로만 점철된 이땅의 정치지평에 새로운 색깔을 더하고자 하는 용트림의 기수인 것이다. 그 새로운 색깔의 목소리를 주권자에게 알리지 않고, 주권자의 검증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언론의 직무유기라는 지탄을 벗어날 수 없다. 주권자의 ‘알 권리’를 위한 ‘알릴 의무’의 배반이라는 질타를 벗어날 수도 없다.

거대 미디어 종사자들의 선배이며 민정당 국회의원과 노동부장관을 지낸 남재희씨는 <노동과 세계>(97년 10월31일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 보수정당들은 정체의 늪에 빠져있는데 진보정당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처럼 건전해질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어 보수와 진보의 견제균형을 말한다.

또 그는 이땅의 보수정당과 기업들도 이젠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 노력을 오히려 격려하는 도량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도 충고한다. 나는 그가 말하는 균형과 도량을, 단순한 균형과 도량으로만 이해하지는 않는다.

진보의 목소리를 죽이는 것은 진보의 죽임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세기말’의 어둠을 뚫고 ‘신세기’를 열어내는 출구의 제한이며 봉쇄로 이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출구의 지평을 좁히거나 막는 작태이다. 때문에 균형과 도량은 그 지평 넓히기의 세기적 요청으로 번역되어 마땅할 터이다. 진정 이 나라 이 겨레의 오늘과 내일을 걱정한다면 출구의 지평을 좁히거나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은 희망의 제한이며 봉쇄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