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광주를 다녀왔던 조성호 일간스포츠 레저부장은 당초 5·18 취재기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 5·18의 실상이 세세하게 세상에 밝혀진 마당에 묵은 취재수첩을 뒤져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기자로서 참상을 지면을 통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자책감도 원고 게재를 주저하게 한 요인이었다.

“광주를 갔다 회사에 돌아오니 선후배들이 ‘눈에 핏발이 섰다. 살기가 돈다’고 하더군요. ‘한’이 무엇인지 그 깊이는 어떤것인지 절실히 체험한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군인들에 의해 시민군이 진압된 27일 오전 도청에서 본 한 주검을 잊지 못한다. 꽃이 떨어진 화단옆에 피를 흘린채 누워 있던 청년. 그 청년의 주위엔 철모와 구멍난 둥근 쟁반이 뒹굴고 있었다.

서울 동국대 전산원 1년 박병규군(1960년생)으로 확인된 이 주검은 오랜 세월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의 죽음이 결국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유인작용을 했다고 믿고 있다.

“되도록이면 현장을 지키려 했습니다. 금남로와 광주역 등을 자전거로 오고 가면서 많은 것을 봤습니다. 광주지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한때는 기자들을 전부 잡아간다는 얘기를 듣고 주재기자의 매형집으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진 고생에 비해 그 보상은 참으로 허탈했다. 80년 연말 언론계에 강제해직 바람이 불면서 조 기자 역시 그 명단에 포함됐다. 당시 편집국장은 그를 조용히 찻집으로 불러내 “회사를 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각오를 하고 있으라”고 통보했다. 다행히 경영진들이 나서 해직 명단에서 뺄수 있었지만 광주를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겪은 기자들은 허다하다.

“아직도 언론사가 군사문화의 잔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기자들의 대화가 분절되고 사적인 얘기외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사라졌어요. 침묵의 공간에 가둬놓다보니까 기자들의 사회적 각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는 넓게는 이러한 언론계 내부의 침묵이 80년대 군사문화에 잇닿아 있다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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