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개무량. 기자들의 서문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심정으로 시작된다.

한 외신기자는 80년 5월 광주 취재를 “내 생애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엄청난 슬픔과 서러움이었다”고 회고했다.

17년만에 공개된 취재기자들의 묵은 취재수첩속에는 총격과 살육, 그리고 안타까움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한국기자협회와 무등일보, 시민연대모임이 공동으로 펴낸 ‘5·18 특파원 리포트’(도서출판 풀빛 간)는 80년 5월 광주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로 기록될 듯 하다.

당시 현지에 파견됐던 내외신 기자들의 증언내용은 다소 다르지만 그 기조는 한결같다. 기자생활 가운데 가장 참혹한 취재현장이었으며 그것을 기록하지 못했던 자책감과 울분,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밝히고 있다.

일단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간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외신기자들의 취재기. 테리 앤더슨(당시 LA타임스 일본총국장), 헨리 스코트 스톡스(당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 심재훈(당시 뉴욕타임스 서울주재기자), 게브하르트 힐셔(당시 슈트 도이체 차이퉁 극동특파원), 마쓰나가 세이타로( 당시 요미우리신문 홍콩 특파원), 샘 제임슨( 당시 AP통신 기자), 유르겐 힌츠페터(당시 NDR, ARD 카메라 기자), 블레들리 마틴( 당시 볼티모어 선 서울특파원) 등 외신기자들이 광주 문제를 보는 시각은 흥미롭다. 단적으로 “광주는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테리 앤더슨)는 것이다.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글라이스틴씨의 상황인식과 잘못된 대응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시민군 대변인이던 윤상원씨의 중재 요청으로 미국 대사의 개입을 호소하는 기사를 뉴욕타임스에 보냈던 그는 취재기를 통해 글라이스틴의 과오를 오목조목 거론하고 있다.

당시 시민군들은 상대적으로 내신 기자들보다 외신기자들을 더욱 반겼다. 어느 순간에는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폭도로 매도 당하는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던 광주시민들은 외신에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5월 21일 오전 바리케이트를 밀치고 광주 시내에 진입한 뉴욕타임스 심재훈기자와 르몽드 필립 퐁스기자는 시민군의 뜨거운 환영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의 차가 앞장서고 우리는 뒤를 따랐다. 그의 손에는 핸드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핸드마이크로 길 옆의 광주시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프랑스 르몽드 기자가 광주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드디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자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변의 군중이 우뢰와 같은 박수로 우리를 환영했다.”

이들 시민군의 기대는 단순히 ‘희망’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뉴욕타임스 심기자와 르몽드 기자는 광주 현지의 참상을 본사로 송고했고 21일자 신문에 ‘광주’ 문제가 1면 머릿기사로 나갔다. 특히 심기자는 이 기사로 인해 세계적인 특종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항쟁이 끝나자 자신의 부인인 장명수 현 한국일보 이사와 함께 남영동으로 연행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들 외신기자들과는 달리 내신기자들의 취재기는 한 마디로 암울했던 ‘80년 5월’에 대한 ‘참회록’이다. 눈앞에서 사람들은 죽어가지만 기사 한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기자,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가는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만, 갈수록 거세지는 군인들의 통제. 결국 “시위대가 도청에 진입하던 날 저녁, 취재 중 금남로에서 만난 한 대학생이 나를 붙들고 ‘기자들도 적’이라며 눈을 부릅뜨는”(한국일보 조성호) 상황으로 발전한다.

그래도 다행히 ‘황당한 진실의 왜곡’을 감행한 신문들이 광주에 거의 배달되지 않아 현지 취재기자들은 큰 화를 면할수 있었다. 서울서 급파된 기자들은 본사에 ‘제발 신문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호소해야만 했다는 것이 취재기자들의 설명이다.

오효진(당시 MBC 사회부), 장재열(당시 중앙일보 광주 주재), 조성호(당시 한국일보 사회부), 김충근(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김양우(당시 국제신문 사회2부), 류종환(당시 부산일보 사회부), 서청원(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김대중(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황종건(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등 내신 기자들은 대부분 광주 취재가 자신의 삶의 큰 멍에로 작용했고 삶 자체가 완전히 뒤 바뀌기도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MBC 취재반장 자격으로 5·18을 목도했던 오효진씨는 “서울로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실상을 보고했고 이 눈물탓인지 포고령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목이 잘렸으며 그후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다”고 회고했다. 중앙일보 장재열기자는 취재기 말미에 참회록을 썼다.

“나는 보고도 말하지 못하고 알고도 쓰지 못했다. 죽음으로 항거한 젊은이들에게 무슨 할말이 있을 것인가. 제대로 사실을 알리지 못한 기자의 한 사람으로 광주현장의 민주시민에게 사과의 말을 드린다.”
이러한 심정은 다른 기자들도 비슷하다. 부산일보 류종환기자는 상당기간 기사를 쓰지 못하는 일종의 감정의 진공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어떻게 동족끼리 그럴 수 있느냐는 인간에 대한 회의가 나를 얼간이 처럼 만들었다. 다시 사건기자로 돌아 왔지만 무엇이 기사인지 무엇이 사건인지 구별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상당기간 기사를 쓰지 못하고 멍청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비단 광주 취재 경험은 악몽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순전히 광주를 다녀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직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5·18 특파원리포트’에는 두 명의 카메라 기자가 등장한다. 독일 NDR, ARD TV의 유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황종건기자.

힌츠펜터 기자는 한국정부의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고 본사 편집국장에게 한국 취재를 자원해 5월 20일 서울에 들어왔다. 무려 22시간에 걸쳐 광주에 들어간 그는 21일까지 맹렬한 취재활동을 벌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본사에 광주 현지 필름을 송고해 그 참상을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는 23일 광주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그의 필름은 80년대 광주 문제가 마치 음험한 암호처럼 구전으로 떠돌던 시절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이라는 비디오 테이프로 담아져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포됐다.

이 비디오 테이프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사회와 역사에 대한 자각과 결단을 내리는 소재로 활용됐다. 동아일보 황종건 기자는 “신문에 실리지 않은 사진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며 목숨을 건 사진취재 뒤에 남은 공허감을 드러냈다.

당시 사회부장으로 당국의 안내를 받아 광주를 방문했다가 ‘바리케이트 너머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는 리드로 시작하는 르포기를 게재했다가 두고 두고 비난을 샀던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참회기를 썼다.

“나는 지금 그럴 바에야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 두고 싶다.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할 수 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김 주필의 참회기는 한겨레 21 등 일부 언론에 의해 ‘진정한 참회가 없다’는 비판을 사기도 했다. 그의 무게에 걸맞는 고백과 자성 보다는 예의 상황론을 내세워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5·18 특파원리포트’는 광주 지역 일부 언론인들과 시민들의 열성적인 의지의 산물이다. 이 책의 기획단계에서부터 필자선정 그리고 원고청탁까지 대부분의 실무 작업을 총괄했던 김 성 무등일보 편집부국장은 “광주 항쟁 곳곳에 묻어 있는 인권문제와 80년대를 관통하며 결국 역사적 승리로 귀결된 지난한 싸움을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기자들을 통해 다시 조명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5·18 특파원리포트’에 필자로 참여했던 기자들과 당시 광주 현지에서 취재활동을 벌였던 언론인들은 오는 16일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고 ‘5·18 취재기자클럽’을 정식으로 결성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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