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MBC < PD수첩>은 8·15 특집으로 현대판 친일파를 다룬 '신 친일파의 정체를 밝힌다'를 방영했다. 지금은 일본으로 귀화한 오선화씨는 지금까지도 각종 강연과 서적을 통해 '친일'을 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만진 PD의 취재후기를 싣는다. /편집자

방송한 후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컸다. 네티즌들은 예상보다 더 크게 반응했고 많은 매체들에서 후속기사를 썼다.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예상 밖인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오선화씨의 반응이었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그의 책 <치맛바람>의 대필논란이 일었을 때만 해도, 오선화씨는 한국의 언론보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다. 방송에서도 소개되었지만, 그는 당시 일본에서 발간되는 모 잡지에 '분노의 반론'을 펼친 적도 있으며, 몇몇 한국 언론사의 도쿄 지사를 방문해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오선화씨, 뭐라고 반론 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 MBC < PD수첩> '신친일파의 정체를 밝힌다'의 한 장면. ⓒMBC  
 
전 동거남, 기요츠카 마고토 씨와의 만남

오선화씨 입장에선 이번 < PD수첩>의 방송 중 전 동거남이었던 기요츠카 마고토(淸塚誠)씨의 증언 내용이 가장 뼈아팠을 것이다. 너무나도 속속들이 자신의 예전 이야기를 알고 있는 그가 한국의 방송사 카메라 앞에 나서서 정식으로 인터뷰할 줄 오선화씨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내 주위의 사람들은 오선화씨의 전 동거남인 기요츠카 마고토씨가 '왜 < PD수첩>과의 인터뷰에 응했을까?' 하는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기요츠카씨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지금은 헤어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한때 좋아해서 그래서 5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하기 쉬운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요츠카씨는 처음에 우리가 '오선화씨 문제로 취재하러 왔다'고 하자 '아직도 그 여자 문제가 계속 이슈가 되고 있나요?'라고 하며 흥미를 드러내면서도, 공식적인 인터뷰 제의에는 머뭇머뭇 망설였다. 그는 지금의 오선화를 비난하고 싶어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만 보자면야 나를 떠난 여자라고는 해도, 그래도 한 때 같이 지내던 여자가 대학에서 교수까지 될 정도로 성공했다는 건 듣기 좋은 이야기인데…'’라고 몇 번이고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그가 인터뷰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제작진이 준비해 간 몇 권의 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오선화씨와 헤어진 이후에는 연락이 끊어져, 최근 오선화씨가 썼다는 글들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필자는 오선화가 썼다는 <한국병합에의 길>, <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 그리고 타쿠쇼쿠 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저널 <일본문화> 및 <신일본학> 등에 게재된 오선화의 글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 글들을 잠시 살펴보더니 이야기했다. '와…이 글은 막스 베버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군요', '하하. 이 글은 만엽집(萬葉集)을 인용하고 있군요. 하하….' 한동안 글들을 살피던 그의 표정은, 그러나 이내 곧 바뀌면서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인터뷰하자고 했다. 더 이상 오선화가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요츠카 마고토씨와의 3시간 동안의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그는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무수히 쏟아냈다. 그녀의 책에 고스트라이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부터, 방송에서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오선화씨가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 과정, 가족관계, 지적인 수준, 성격 등등 오선화씨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일단 그녀의 출세작 <치맛바람>의 대필논란에 그는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확고히 말했다.

"그녀는 여러 번 <치맛바람>의 원고를 자신이 몇 개월 동안 직접 썼으며, 구체적으로는 한국어로 먼저 쓰고 이걸 나중에 자신이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그러나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그녀는 일본어를 타자기로 입력하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어떻게 그런 원고를 쓸 수가 있냐?"고. 이 대목에서 그는 웃었다. 그리고는 계속했다.

"말이 안되는 가정이지만, 오선화씨의 말대로 먼저 한국어로 자신이 직접 원고를 작성하고 그걸 나중에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난 이후, 한국에서 <동경25시>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할 때, 왜 굳이 다시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사람을 구했는가? 자신이 써놓았다는 한국어 원고가 있다면 이걸 그냥 직접 손봐서 책으로 내면 되지 않느냐? 그럼에도 불구, 그녀는 일본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할 사람을 구했고, 나중에 그 사람의 번역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말이 안 되지 않느냐?"고.

또 그의 이야기 중에서 '묘청의 난'을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방송을 보신 분들께선 아시겠지만, 그는 한국어가 대단히 유창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 대학 정치외교학과에서 석사를 마쳐서 한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읽던 책에서 '묘청의 난'이라는, 그에게는 생소한 역사용어를 발견하고는 그 의미를 몰라 동거녀였던 오선화씨에게 '묘청의 난이 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선화의 대답은 그냥 '묘청? 난 그런 거 몰라'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기요츠카씨는 '묘청의 난'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한국의 대학 이상의 과정에서나 배우는 전문적인 한국사 지식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 후 한국인 친구들과 같이 있게 된 자리에서 다시 '묘청의 난' 이야기를 꺼낸 기요츠카씨는 '한국 학생 중에 입시공부한 사람이면 묘청의 난을 모를 수는 없다'는 한국인 친구들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이전부터 짐작해오던 것이었지만 오선화씨의 교양수준에 대해서 평가를 끝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오선화씨가 썼다는 책 <한국병합에의 길>을 한 손에 쥐고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아니다. 내가 예전에도 위험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이건 정말 아니다"라고.

아직도 모두 자신이 쓴 글이라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방송을 위해서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에게서도 오선화씨가 썼다는 <한국병합에의 길>에 대한 자문을 받았는데, 이 책에는 한국사 해당시기 세부전공자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인용되고 있는 등, '도저히 비전공자가 썼다고 볼 수 없다'는 대답이 나왔다.

이십 대 후반에 '묘청의 난'을 전혀 모를 정도로 한국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던 그녀가, 일본의 어느 대학 학부에서 '영어과'를 다니고 난 후 대학원에서는 '미국 중산계급의 붕괴'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를 마쳤다는 그녀가, 여기저기 그 비싼 돈 받고 한다는 외부 강연 불려 다니느라 바쁜 그녀가, 그 수없이 많은 잡지 기사를 직접 쓰셔야했던 그녀가, 도쿄 인근에 있다는 자신의 별장에 친구들 초대해서 즐기실 정도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시는 그녀가, 도대체 어느 시간에 갑자기 이 정도의 전문서적을 써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개항사를 포함한 일제시기 역사뿐만이 아니다. 오선화씨의 전문분야는 이미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다. 일본문화, 일본고대역사, 일본문학, 기미가요나 신사신도 문제 등 일본의 종교·철학 관련 부분에서부터, 한국드라마를 포함한 한국대중문화, 한국현대정치, 납치자 문제 및 북한미사일 문제 등 북한정치 분석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녀의 귀화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

   
  ▲ 오선화씨 강의 장면. "한반도 태풍은 일본이 다 막아준다. 한반도에서 보면 고마운 일이다" "욘사마나 쫓아다니는 기품없는 사람들이니 독도 문제나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발언하지 못하는 것이다" 등의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MBC  
 
< PD수첩>은 방송에서, 오선화가 1998년 일본으로 귀화했음을 시청자들에게 알렸으며 지금도 오선화씨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귀화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 역시 지적했다.

그런데 아마도 이 대목에서 오선화씨는 약간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화한 지 많은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최근들어 월간지 <쇼쿤(諸君)> 2006년 6월호에서 자신이 일본인으로 귀화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일을 하는 이상 제대로 된 발언을 못하면 실격이라는 생각도 들고 글 쓸 때 피곤했었는데, 귀화하고 나니깐 주일한국대사관에서도 마음대로 못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앞으로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발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1998년에 귀화한 이후 그 사실을 공개적인 매체에서 밝힌 적이 없었고, 주변인들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았지만(방송에서 소개되었듯, 그녀를 교수로 추천한 이지리 가즈오씨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 최근에야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해놓는 편이 깔끔하겠다고 생각한 듯도 하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외부강연에 목을 매는 프리랜서도 아니고, 대학의 시간강사도 아니다. 이제는 어엿한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吳善花라고 하는 이름을 'Go Zen Ka'가 아니라 'O Son Fa'라는 한국식 발음으로 사람들이 읽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사람들은 내가 1956년 제주도 출생임을, 그래서 내가 한반도 전문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귀화했음을 밝히더라도 내가 손해를 입을 시기는 지났다. 어차피 일본인의 자격으로 한국으로 여행하는 것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제는 밝혀도 문제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번 방송 제작과정에서 일본 현지 코디네이터로 일한 스탭은 취재 초기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라면서, 한편으로 즐거워하며 한편으로는 무척 궁금해했다. 오선화라는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지를 꼭 알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취재가 진행될수록 그는 점점 허무해진다고 했다. '뭔가 거창한 무엇 때문에, 뭔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오선화가 조국을 등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처음의 생각은 점차 사라져갔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오선화씨가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저러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선화씨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 개발해낸 것이다. 평소 그녀는 친하게 지내는 일본 우익인사들에게 '나는 한국의 언론사들에게서 테러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한국사람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말 것을 부탁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내가 갑자기 무슨 무장테러단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수업시간에는 '한국의 유명한 국회의원들이나 정치인들이 내게 가끔 연락을 해서 좀 자제하라고들 이야기하는데, 난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당당한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인다고 하니, 어느 쪽이 그녀의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의 반론을 기대한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 본인임이 분명함에도 불구 '나는 친척이다. 오선화씨는 유럽에 가서 8월 말에야 일본에 돌아온다'라고 이야기해와, 기대했던 그 당당함이 느껴지지 않아 실망했다.

또 그로부터 이틀 후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사장의 사무실에서 오선화씨 집전화로 연락을 했을 때, 목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애처로움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그 때 나는, 평소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는 그 당당함이란 '그냥 억지로, 힘들게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매우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아니라면…오선화씨, 이번에도 반론 좀 제기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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