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자 전국단위 일간신문 사회면에는 재개발·재건축 비리 관련 기사가 비중 있게 보도됐다. 이수건설, 경남기업, 현대건설, 한신공영 등 유명 건설업체들이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브로커를 고용해 지역 주민들에게 돈을 뿌리거나 각종 청탁을 들어준 재개발조합장과 도시계획위원인 교수들에게 금품을 건네다 적발된 사건이었다.

대검찰청은 전날 이 같은 내용의 보도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했다. 검찰은 당일 보도자료에 이들 건설업체의 비리 혐의를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이들 건설업체는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60∼70억 원의 홍보비를 사용하고, 그 부담을 고스란히 아파트 분양을 받은 사람에게 전가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또 이번 사건에 연루된 건설업체 임직원과 조합장 등 127명을 입건해 이중 37명을 구속 기소하고 8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조선·중앙일보만 실명 사용…한국경제, 보도조차 안 해

   
  ▲ 8월4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  
 
그러나 4일자 대부분의 일간신문에는 비리 건설업체명이 '이니셜' 처리돼 있었다. 실명보도를 한 곳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뿐이었다. 한국경제는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일자 신문에 현대건설 광고를 게재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건설업체들의 비리 기사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신문사 한두 곳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이 이런 보도태도를 보이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회면(A9면)에 <뇌물잔치 벌이고 아파트값 올린다>는 제목의 기사를 배치하고, 비리에 연루된 건설·시공업체의 구체적인 혐의 내용과 실명을 낱낱이 공개했다.

중앙일보는 종합면(2면)과 사회면(8면)에 각각 <이수건설, 재개발 수주 3억 로비>와 <아파트값 비싼 이유 있었네>를 올리고, 사회면 기사 하단에 비리 악순환의 고리가 왜 발생하고 있는지 분석한 기사 <건설사 "이권 거머쥔 조합 로비에 목숨 걸어">를 덧붙이는 등 관련 사안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이수건설…> 기사에 재개발 과정에서 홍보전문 '아줌마 부대'를 고용해 돈을 살포한 이수건설의 혐의를 중심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이 때문에 이수건설은 보도 직후, "왜 우리만 실명을 넣었느냐"는 불쾌감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아일보도 이날자 사회면 <재개발-재건축 비리 127명 무더기 적발>에서 이수건설의 실명을 공개했다.

지난달 3일자에 보도된 현대건설 재건축 비리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건설업체의 고질적인 상납관행과 공사비 부풀리기 등 비리 수법이 이번과 유사했다. 하지만 전국단위 종합일간신문과 경제신문을 통틀어 제목과 기사에서 모두 현대건설 실명을 밝힌 신문사는 조선일보와 한겨레 단 두 곳이었다. 일부 신문은 판갈이 과정에서 실명을 이니셜로 바꾸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소여부가 잣대…"보도자료에 이미 실명 포함돼 있었다" 

   
  ▲ 8월4일자 중앙일보 2면 기사  
 
문제는 신문사들이 건설업체들의 구조적 비리를 다룬 기사를 보도할 때마다 '이니셜'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니셜' 보도의 원인으로 먼저 검찰 출입기자들의 보도 기준이 제 각각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A기자는 "이니셜로 기사를 써서 (회사로) 송고해도 데스크가 오히려 실명으로 고치는 경우도 있다"며 "검찰의 기소 전까지는 (보도에 있어)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기소했을 때는 그런 게 정리됐다고 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실명을 쓴다"고 했다. 이 기자의 말대로라면 이 신문사는 지난 4일자 관련 기사에 실명을 썼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B기자도 검찰의 기소 여부를 보도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실명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굳이 실명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 기자는 "적발된 업체는 수없이 많은데, 업체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실명을 공개해 보이든 보이지 않든 피해를 가게 하는 게 바람직한가란 고민이 있었다"며 "실명을 밝히는 게 좋겠지만, 비리 유형을 봐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기사에 실명을 사용한 기자들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검찰이 보도자료에까지 비리 건설업체들의 회사명을 공개했기 때문에 굳이 이니셜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데스크에게 실명으로 보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직접 올렸다는 C기자는 "검찰의 보도자료에 첨부한 자료에도 실명이 나왔고, 이수건설의 경우 관련기관에 이미 행정처분 통보까지 한 상태였다"며 "그 같은 경우 나중에 소송으로 가도 위법성 조각사유에 해당된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D기자는 "익명 보도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온 사람은 있었지만 보도에 고려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며 "기자들이 익명 보도를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건설업계 신문광고비 800억대…광고매출 비중 많게는 20%대 후반

이니셜 보도의 또 다른 원인에는 부동산 광고가 꼽힌다. 기사 작성의 주체인 일선 기자들과 회사 내 여러 사정을 감안해야 하는 데스크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실명이 포함된 기사를 작성해도 데스크가 익명으로 고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기자들은 전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가 바닥을 친 올해 상반기에도 건설업계는 신문에 800억 원 이상의 광고비를 집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디어오늘이 KADD NMR의 자료를 토대로 올해 상반기 상위 200위권 내에 포함된 건설사, 시행사 등 건설업계의 광고비를 집계한 결과다.

   
  ▲ 2006년 상반기 건설사 광고비 집행 현황  
 
건설업계에서 최고의 광고주는 116억 원을 집행한 대우건설이었다. 대우건설은 TV광고와 신문광고로 각각 53억 원과 52억 원을 사용했다. 각각 71억 원, 58억 원, 55억 원을 집행한 효성건설, GS건설, 대림산업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효성건설은 전체 광고비 71억 원 모두를 신문광고에 사용해 신문광고업계의 최대 광고주였음이 확인됐다. 현진건설, 대주건설, 유진, 프라임개발, 도시산업개발 등 중소규모의 건설사도 신문광고에 30∼40억 원대의 적지 않은 돈을 사용했다. 

상반기 광고주 순위 200위 내에는 들지 못했지만 쌍용건설, 대방건설, 남광토건도 신문광고에 각각 21억 원, 23억 원, 12억 원을 집행했다. 태영은 SBS의 대주주 답게 전체 광고비 27억 원 중 22억 원을 방송광고에 배정했다.

개별 건설사들의 광고비가 신문사 전체 광고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을 수 있지만 한 데 모아놓고 보면 엄청난 규모가 된다. 800억 원대의 광고비는 상반기 전국단위 종합일간신문(내일신문 포함 11개·미디어오늘 집계)의 전체 광고매출액(4863억 원)의 16.5%에 달하는 금액이며, 한달치 광고매출액에 버금가는 규모다. 다시 말해 이 돈이면 11개 신문사가 한달 정도를 버틸 수 있다는 의미다.

조중동 3사의 경우 부동산 광고가 전체 광고매출액의 17∼2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가·오피스텔 등 분양광고가 상대적으로 많은 경제신문은 그 정도가 심해 20%대 후반에서 많게는 30%까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현대·LG 등 대형광고주가 신문사 광고매출액에 몇십%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광고의 절반 이상이 몇몇 대형광고주와 부동산업계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매출과 보도에 미치는 기업의 영향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문업계에서 이 둘간의 상관관계 자체를 부인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다. 바로 이 부분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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