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냥이 시작됐다.”

1980년 5월 20일, 광주항쟁의 현장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기사의 첫 머리를 이렇게 적어 보냈다고 한다.

“하기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 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이 등 뒤 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꼬꾸라졌다. …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다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기자의 뒤늦은 증언이다. 그 모두가 광주항쟁 17주기를 맞아 발간된 ‘5·18 특파원 리포트’에 담긴 내용들이다. 참으로 17년의 세월동안 활자로 살아나지 못했던 전율과 충격의 기사이다.

‘17년만에 공개된 내외신 기자들의 광주 5월 민중항쟁 취재수첩’이라는 부제가 붙은 ‘연착’의 리포트는 새삼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내란 학살범들에 대한 단죄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광주일 뿐인가.

나는 ‘5·18 리포트’를 읽으면서 참담과 분노를 넘어, 광주가 남긴 또 다른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 리포트는 물론 일찍이 이땅의 언론에선 접하지 못했던 기사다운 기사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언론에 종사하고 언론을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어떤 텍스트 보다도 소중한 ‘텍스트’라는 생각을 지워버릴수 없었다.

그 1부는 이른바 외신기자, 외국 특파원들의 해묵은 현장 보고로 채워진다. 그들은 이른바 내신기자, 이 땅의 기자들과는 달리,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어김없이 보도한다. 송고의 불편이 있었을 뿐 계엄령의 통제에 구속되었을 턱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광주의 시민들로부터 개선장군과도 같은 환호를 받는다. 취재의 편의도 자발적으로 제공된다. 때문에 그들의 고민은 보도의 제약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저버린 ‘사냥’의 현장을 사실대로 보도해야 하는 ‘비인간의 기사’에 진절머리를 낸다.

어떤 특파원은 기자와 외교의 문제로 말미암아 고민한다. 광주 시민군의 대변인이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이 사태를 똑바로 전달하고, 중재에 나서게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사태의 중재에 나서야 하는가. 사건에 개입해야 하는가.

부럽다면 부러운 그들의 고민은, 사실 언론의 ‘텍스트’가 정리해야 할 현안들이다. 진실의 보도와 독자의 호응이라는 수용효과이론도 여기서 단서가 잡힐 법하다.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는 현장에서도, 기자는 그저 보도의 임무에만 충실해야 하는가. 이어지는 학살을 방관해야만 하는가. 그 또한 언론의 ‘텍스트’가 응답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제2부를 채우는 내신기자들의 리포트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 땅의 일을 이땅의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알려야 하는 기자들은, 계엄령과 검열이라는 원천적인 통제에 갇혀 고민한다. ‘가짜 신문’ ‘가짜 방송’을 이어가야 하는 이땅의 기자들은, 당장 시민들의 적으로 지탄된다. 방송국이 불타고 기자들은 신분을 숨겨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기자는 누구의 편인가.”

시민들은 핏발선 눈으로 이땅의 기자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기자인가. 당신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서점을 장식하는 언론의 교과서들이 제기해야 할 문제들을 수용자의 대열이 뉴스의 현장에서 들이댄다. 기자는 폭력의 편인가. 시민의 편인가. 정의의 편인가. 불의의 편인가. 독재의 편이어야 하는가. 민주의 편이어야 하는가.

읽어갈수록 ‘5·18 리포트’는 교조적이거나 주입식이 아닌, 살아있는 언론의 ‘텍스트’임을 실감하게 된다. 가령 주어진 상황속에서, 기자란 그 주어진 상황을 넘어설수 없었다는 ‘고백’과 ‘변명’만 하더라도 그렇다. 기자란, 언론이란 어차피 제약의 상황에 갇힐 수밖에 없는가.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 물음 역시 응답을 재촉하는 ‘텍스트’의 자료일 터이다.

우리의 ‘텍스트’가 응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설령 5·18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땅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상황들은 여전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언론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어지는 물음들 앞에서, 나는 5·18의 ‘본안’과 이어져 있으면서 한편으론 따로 떨어져 있는, 언론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헤아려 보며 망연해진다.

강도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날의 물음들은 오늘에도 유효한 탓이다. 물론 계엄령의 상황이 풀린지는 오래이다. 그러나 이 땅의 언론은 오늘, 누구의 편인가.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바꾸어 말해서 새로운 상황논리를 펄럭이며 불가피한 선택임을 강변하는 버릇은 청산되었는가.

다시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물음들을 아무리 잠재워 보려 해도, 무거운 한 마디가 나를 풀어주지 않는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언론의 ‘5·18’은 과연 끝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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