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우리는 기사에 대한 논쟁을 중지하고 회의를 열었다. 앞으로 남은 5시간을 가지고 어떤 기사를 누가 맡느냐였다. 외교담당기자 머레이 마더는 기사를 가장 잘 쓰는 사람중에 하나였으나 글 쓰는 속도가 느려 한 꼭지를 맡겼고 돈 오보도퍼는 전체 윤곽을 제시하는 기사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거실에서는 좀 분위기가 달랐다. 고문변호사들은 기사화에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었다. 나중에 워싱턴 포스트의 이사장을 맡은 고문변호사 프리츠 비비는 기사화가 3천5백만달러에 달하는 워싱턴포스트의 증자계획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해서 나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문제는 또 있다. 뉴욕타임즈가 받은 법원의 강제 명령 등으로 사주가 파렴치범으로 기소될 경우 법에 따라 TV방송국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워싱턴포스트가 소유하고 있는 3개 TV방송국의 허가권을 취소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 인한 손실은 1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20년이 지난 지금 국방성이 이 보고서를 가지고 왜 그렇게 난리를 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시 이 사건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2등 신문이었던 워싱턴 포스트가 1등 신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단 한번의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것은 언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또 나의 편집국장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변호사들이 모여있는 거실의 강경한 분위기로 인해 나는 더욱 자신이 없어져 갔다. 기사화를 위해 내가 해야하는 최소한의 일은 프리츠 비비를 중립적인 입장으로 설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최종 판단은 캐서린 그래험여사가 내려야한다. 그녀는 그 시간에 판매담당 부사장이었던 해리 글래드스타인의 퇴직파티를 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됐다.나와 프리츠 등 4명은 그래험여사와 전화 회의를 하기 위해 4개의 각기 다른 전화기 앞에 앉았다. 프리츠가 대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기사가 나가지 않을 경우 편집국은 일대 재앙에 휩싸일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녀는 프리츠에게 자문을 구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한참동안 침묵하던 프리츠는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이어 그래험여사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 뒤의 음악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그러다가 갑자기 “좋다. 가자. 기사를 싣자”라고 외쳤다.나는 이말을 듣자마자 총알처럼 일어나면서 그말을 되풀이했다. 온 방안은 환호로 뒤덮였다.

그래험여사의 배짱과 언론자유에 대한 신념이 이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당시 내가 진정으로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래험여사의 결단성이 어떻게 워싱턴포스트의 정신을 바꿔 놓고 데스크들과 기자들의 분위기를 일거에 쇄신했는가 하는 점이다.반역죄에 당당히 맞설수 있는 신문, 대통령·대법원·법무장관에 맞설 수 있는 신문, 고개를 높이 쳐들고 흔들림이 없이 원칙에 충실할 수 있는 신문.모든 결정은 내려졌고 금요일자 신문이 찍혀져 나왔다. 우리는 닉슨 행정부의 반응과 뉴욕 타임즈가 우리 기사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18일 금요일 오후 3시 그래험여사와 그녀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위리엄 렌퀴스트 법무차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워싱턴 포스트가 기사화한 내용은 1급 비밀로서 간첩죄에 해당할 수 있으며 국가의 이해를 결정적으로 침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서류들을 국방부로 돌려 주기 바랍니다.’

간첩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았기 때문에 손과 발이 동시에 떨렸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정중히 당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이후 8일동안 재판이 계속됐다. 18일 오후 6시 지방법원의 판결은 워싱턴 포스트의 팔을 들어줬다. 이어 2시간 후에 열린 항소법원의 결정은 밤 10시15분이 돼서도 내려지지 않았다. 주요 호텔에 우리 신문을 공급하는 허만 코헨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꾀를 냈다. 항소심 결정이 지연되고 있는 동안 신문을 발행해 버리면 법원의 기사화 금지명령이 내려진다해도 이미 발행이 이루어진 그 날짜에는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결국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신문 발행과 함께 LA 타임즈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통신에 기사를 서비스했다. 현재 항소심에 계류중이라는 단서와 함께.

다음날인 19일 새벽 1시 법원의 금지결정이 내려졌으나 예상대로 이미 인쇄하고 있는 기사에 대해서는 계속해도 좋다는 단서가 붙었다.이 법원 저 법원을 뛰어 다니며 무수한 법률 검토를 일과 처럼 하기를 열흘째인 6월 30일 대법원은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신문이 정부로부터 제작에 간섭을 받은 펜타곤 페이퍼 사건으로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어쨌든 우리는 승리했다.펜타곤 페이퍼 사건으로 그래험여사와 편집국 사이에는 신뢰의 관계가 형성됐고 새로운 목표에 대한 합의와 신념도 형성됐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신뢰나 합의·신념을 어떻게 얻는가도 배우게 됐다. ▶다음호에는 워터게이트보도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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