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진원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열풍을 부추기는 곳이 언론인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선두에 중앙일보가 섰다. 중앙일보는 최근 유신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씨(69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재직)의 회고록을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 회고록은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김씨의 육성을 통해 △위기관리 △정치자금 △친인척 관리 △인사방식 △국정운영의 일관성 △비서실 관리 등 박대통령의 통치 일화를 다루고 있다.

언뜻 제목만 일별해봐도 이 회고록이 현재의 정치상황을 직접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직접적으론 한보 사건과 차남 현철씨 문제로 정치자금, 친인척 및 비서실 관리에 있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입게된 김영삼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이 회고록에서 김씨는 박대통령의 약점과 실정보단 미화와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대통령에 대해 실망한 독자가 이 회고록을 읽는다면 박대통령은 절대선이요,
김대통령은 그 반대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 연재가 나가자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곳은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다. 시사저널 5월14일자는 ‘박정희 특집’을 통해 박정희 신드롬의 정체를 파헤치고 있다. 시사저널은 “중앙일보의 연재를 시류에 영합한 상업주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그러나 박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이 긍정 일변도로 회고한 것을 별다른 검증장치 없이 전파하는 것은 정당한 재평가 방식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을 만 하다”고 비판했다.

또 “김씨의 회고록은 군사쿠데타, 헌정 유린, 군부 독재, 인권탄압, 공작정치, 지역갈등 유발 같은 박정희 시대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교묘하게 여론을 왜곡·호도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라고 덧붙였다. 시사저널은 박대통령의 장기집권, 정치자금, 지역안배에 관한 김씨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박정희 논쟁은 지면을 넘어 TV까지 번져갔다. MBC 시사프로그램 ‘시사매거진 2580’은 지난 18일 방영분에서 ‘박정희 향수의 실체’라는 제목하에 박정희를 둘러싼 여러 입장들을 조망했다. 시사매거진 2580은 “교과서 표현대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18년, 그런데 1997년 오늘, 많은 국민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른바 박정희 향수론,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들은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라고 말한다”고 전제하고 이인화씨의 소설 ‘인간의 길’, 박대통령 생가에 방문객이 급증하는 현상,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의 정계복귀, ‘박정희·육영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발족 등 박정희 신드롬의 단면들과 이에 대한 찬반양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시사매거진 2580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고 있는 느낌”이라며 “만약 김대통령의 취임 초기 개혁바람이 지금까지 지속됐다면, 그리고 박대통령 시대에 대해 엄정한 역사 평가가 이루어졌다면 박정희 향수론이 그래도 고개를 들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볼 일”이라고 결론 맺었다.

지난 19일 발행된 시사월간지 ‘말’ 6월호도 ‘보수·진보 진영에 솔솔 부는 박정희 바람’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박정희 신드롬을 해부하고 있다. 말지는 박정희 신드롬을 히틀러 출현 직전의 독일 상황이나 최근 불고 있는 아버지 열풍 현상과 결부시키면서 “현재의 어려움이 과거로의 퇴행을 조장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과 근거를 사장해버린 채 과거의 스케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고 지적했다.

말지는 진보세력 내의 박정희 재평가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박정희 신드롬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낡은 패러다임을 청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도약하기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상징적 표현”이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국민적 합의 속에서 이끌어내는 일, 그것만이 박정희 신드롬을 반동적 퇴행 현상에서 구해내는 길인지도 모른다”고 결론 맺었다.

박정희 열풍은 조만간 조선일보가 가세하면서 절정을 이룰 조짐이다. 조선일보는 전직대통령 시리즈 가운데 얼마전 윤보선 대통령 편을 마치고 현재는 박정희 대통령 편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일보 외에도 신문과 방송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박정희 관련 기획을 다룰 공산이 크다.

언론이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재평가가 얼마만큼 정당한 잣대 아래 이뤄지는가 하는 점이다. 언론이 특정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고 특정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기 위해 박대통령 관련 사실의 일부를 확대·왜곡·과장한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자 역사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론의 박정희 열풍을 지켜보면서 지난 96년 조선일보의 ‘이승만 살리기’가 다시 ‘오버 랩’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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