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방송 3사의 6·25특집은 예년과 달리 일부 프로그램에서 냉전적 시각을 탈피한 흔적이 역력하다.

전쟁의 참화를 일으킨 북에 대한 적개심, 그 다음 수순으로서 남한의 정당성, 이 둘을 가로지르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가 현저히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6·25특집물에 자리한 것은 인간, 그리고 그들의 삶의 울타리로서의 민족이다.

올해의 6·25특집물들은 민족이라는 화두를 앞세워 전쟁의 무모함과 부질없음을 말하고 민족공존의 명제로서 통일을 제시해 마침표를 찍고 있다. 특히 방송 3사가 심혈을 기울인 주요 프로그램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KBS 1997년 6월 판문점(연출 이도경·24일 방영)은 판문점의 현재적 의미를 조망하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나 판문점을 냉전의 유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얽힌 우리나라 방문객들의 통일염원에 포커스를 맞췄다. 휴전선 1백55마일 장벽 중 유일하게 남북을 연결해주는 관문. 그러나 지금 판문점은 민족의 희망을 뒤로 한 채 굳게 잠겨있다.

남녘동포들이 보내는 쌀 수송도 먼 길을 돌아 중국의 육로를 거쳐가야만 한다. 남북회담이 열리면 회담장 곳곳에서 남북의 취재기자들이 이야기 꽃을 피우던 곳. 그러나 지금은 무인카메라만 소리없이 돌아갈 뿐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려 있다.

외국인들은 지구상의 마지막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을 관광하러 오지만 한국인 방문객들은 너나없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방명록에 적는다.

MBC의 바람과 강(연출 장근수·25일 방영), SBS의 설촌별곡(연출 이유황·25일 방영) 역시 종전의 6·25특집극과는 사뭇 다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람과 강은 전쟁의 참상,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6·25를 그려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잡초와 같은 한 인생을 통해 전쟁의 역사가 한 개인에게 어떻게 투영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휴전 협정이 있던 1953년 한 산골 마을 입암. 이인태(이영후 분)는 최지관(박인환 분)에게 자신은 3·1운동 다음해에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1922년 유격 활동 중 일본군에게 잡혀 모진 고문 끝에 귀가 잘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지관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짐승같은 삶을 사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이인태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이인태는 유격활동을 하다 잡혀들어가 모진 고문 끝에 유격대를 도와줬던 마을의 이름을 댔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고 귀가
잘린 것이다.

그의 짐승같은 삶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이었던 것이다. 바람과 강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간,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해 속죄하고자 했던 한 영혼을 통해 시청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역사 앞에서 무죄인가라고.

설촌별곡의 메시지는 통일이다. 휴전선을 코앞에 둔 한 마을 설촌리. 이 마을엔 남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남하했던 병수(김흥기 분)가 다시 북으로 돌아가던 도중 길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 묘순(홍리나 분)의 집으로 찾아들어 사흘을 같이 보내다 사라진다.

묘순은 병수가 월북하다 사살된 사실도 모르고 떠밀리듯 종만(노영국 분)에게 시집을 가게 되고 그때 이미 묘순의 뱃속엔 병수의 아이가 자라난다. 종만은 알 수 없는 남자의 아기를 뱄다며 묘순을 때리다 반신불수가 되고 우연히 병수를 숨겨준 사실을 알게 돼 묘순을 고발한다. 묘순은 국가보안법으로 징역을 살다 나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묘순의 아들 산중이가 산너머에 있는 배다른 형(북쪽에 있는 병수의 아들)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이 드라마는 끝을 내고 있다. 분단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며 또 그 속에서 태어난 새 생명은 무엇을 갈구하는지를 이 드라마는 담담하게 그려냈다. 불행의 끝에 망연자실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묘순의 운명을 통해 우리 민족 전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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