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4일. 평택 대추리가 끝내 피투성이 아수라장이 된 그 날은 지난 2003년부터 황새울 들녘을 카메라에 담아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노순택씨가 자신의 개인전을 꼭 8일 앞둔 날이었다. 오는 12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신한갤러리에서 열리는 <얄읏한 공>이 그 개인전의 이름이다.  그날도 대추리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노씨는 "나의 이번 작업은 나름대로 '에둘러' 가는 것인데, 사태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터지니…"라며 침통하게 말했다.  

노씨는 교수신문과 오마이뉴스 기자를 거쳐 다큐멘터리 웹진 '이미지프레스'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작가의 양해를 얻어 <얄읏한 공> 작업노트를 전재한다. / 편집자  

   
   
 

● 작업노트

“그러니께, 한 7-8년 됐을꺼여요. 우리가 뭔 줄 아남? 그냥 둥그런 걸 높은데다 세워 놓으니께 물탱크나 되는갑다 생각했제. 낭중에는 사람들이 기름탱크라고도 하고, 뭔 안테나라고도 하더만. 우리가 그런 걸 알아서 뭣한데. 그냥 큰 공이다 생각하믄 맴 편한 것 아녀? 멀리서도 이 공만 보면 저그가 우리 동넨갑다 생각하고 반가운 맴이 들기도 하더라니께.”

공의 나이는 어림잡아 여덟 살쯤이다. 30미터의 거구. 누구냐 넌.

이 작업은 경기도 평택 팽성읍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 우뚝 선 야릇한 공과 그 공 주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잇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 1. 공

크다. 이 공은 반경 15km 밖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도시의 마천루를 생각하면 30미터 정도의 구조물은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높은 산이 없고 논과 밭이 드넓게 펼쳐진 평택 팽성읍의 지리환경에서 30미터 높이의 흰 공은 단연코 눈에 띄는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 공은 그저 그런 물탱크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저렇게 반듯한 공 모양의 물탱크는 어딘지 낯설다. 유류, 특히 액화가스를 저장하는 탱크가 저런 공 모양을 하고 있는 경우는 많다. 공 모양의 탱크는 고압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발 가능성이 높은 유류나 가스탱크는 지상에 최대한 가깝게 설치하거나 지하에 매설하는 것이 원칙이다.

희다. 공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밝게 보인다. 인공적인 반사물체가 많지 않은 농촌의 들녘에서 이 공은 봄여름의 짙은 초록 위로, 가을겨울의 어두운 갈색 위로 한껏 도드라져 스스로를 뽐내고 있다.

크고, 희다. 너른 들녘을 전경으로 우뚝 솟은 크고 흰 공. 멀리 안중읍에서도 관측할 수 있는 너. 대수롭지 않게 다가와, 야릇하고도 특별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너. 너는 대체 누구냐.

   
   
 
 ○ 2. 구글 어스

최근에 네티즌의 관심을 모았던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통해 이 공을 찾아보았다. 승용차까지도 판독할 수 있을 정도의 해상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인공위성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지구 밖의 시선에서 시작해 우리집을 들여다보고, 친구와 부모님 댁을 찾아다니는 여정은 재미있다. 내친김에 평양과 청와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단 몇 분 안에 넘나들 수 있다. 오, 놀라워라. 허나 우리에게 공개된 장면이 이 정도라면, 팬타곤의 군사위성이 찍어대는 장면의 해상도는 어떨까. 두려운 일이다. 기술은 경이롭지만, 기술을 휘둘러대는 자들은 두렵다. 하여튼.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의 너른 들녘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공이 위치한 지역은 결정적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해당지역은 군사시설 지역이었다. 나는 이미 그 공이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 소유의 장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글 어스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선명하게 보이는 마을의 일부와 들녘, 뿌옇게 흐려진 캠프 험프리의 윤곽을 어림잡아 콕 찍은 흰 공의 좌표뿐이었다. 17개의 디지털 숫자였다.

   
   
 
 ○ 3. 없던 정도 싹트는 법

나는 지난 3년 동안 수시로 대추리를 드나들었다. 미군기지 철조망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살림집들은 낯선 풍경이었다. 마을은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대추리를 가면서, 그 너른 황새울 들녘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황새울 들녘에 서 보았으면서 저 흰 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저게 뭘까.... 호기심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미군기지 안에 있으니, 응당 군사시설물일 것이고, 생긴 모양을 보니 대단한 물건이라기보다는 물이나 기름 따위를 저장하는 탱크이리라.

저게 뭘까.... 강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은 저 구조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부터였다.

저 공을 바라보며 수년간 생활해 온 마을 주민들도, 오랫동안 미군기지철수 운동을 해왔다는 활동가도 흰 공의 정체에 대해 뚜렷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오래 보면, 없던 정도 싹트는 법이던가. 보면 볼수록 공은 내게 야릇하고도 특별한 감정을 쏘아댔다. 자연스럽게 흰 공을 담은 필름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흰 공과 사람들, 곡식, 새, 꽃, 나무, 풀, 기러기, 가창오리, 똥개, 황소, 고양이, 물, 철조망, 집, 트랙터, 자동차, 달, 구름, 깃발이 함께 필름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 4. 레이돔

사진을 찍은 양이 피사체에 관한 지식의 질과 양에 비례한다면, 아마도 세상의 사진가들은 셔터를 더 많이 누르리라. 허나 사진의 양과 피사체에 관한 지식의 양은 상관은 있을지언정 비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흰 공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나는 한미연합사 공보실에 협조문을 띄웠고, 지식검색을 지원하는 포털 사이트에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이 구조물이 무엇인지를 문의했다.

한미연합사 공보실에서는 답신이 오지 않았다. 다행히 지식검색창에서 누군가 쪽지를 보내왔다.

“이건 공이 아니라.... 혹시 사진촬영지 부근에 공군비행장이 없던가요? 공군비행장 부근이라면 레이더입니다.”

뒤늦은 얘기지만, 이 정도는 나도 추측하고 있었다. 흰 공의 정확한 명칭과 재질, 용도를 알고 싶었던 나는 그 누군가에게 재차 물었다.

“미안합니다만, 성능이나 재질은 군 보안사항으로 공개하지 않으니까 모르겠고요. 더더욱 미군들이 사용하는 장비들은 더 공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직사각형의 파리채 모양으로 생겨가지고 돌아가는 레이더보다는 이 원형의 레이더가 탐지능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정도만 알고 있으며, 규모가 큰 미공군기지에서 사용하는 레이더들은 대부분 이런 원형의 레이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공군기지에서 카투사 레이더병으로 복무하다 전역한 사람들은 이런 레이더의 성능이나 재질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오니 이런 사람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였다. 전문가의 협조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 공군에 근무했던 군사전문가와 오랫동안 분단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던 사진가 이시우 씨의 도움을 통해 흰 공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레이돔.
radar + dome = radome.

뭐든 이름이 중요한 법이다. 이름을 알고 나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여러 의문이 해소되는 동시에, 이것의 다양한 용도와 제기되었던 문제들도 알게 되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레이더는 접시모양의 안테나가 회전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다. 레이돔은 이러한 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섬유 등의 특수 절연재질로 만들어진 막을 둥글게 씌운 것이다. 가스저장 탱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형은 내부의 압력을 지탱하는 데에도 훌륭한 역할을 하지만, 외부의 압력을 막아내는 데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형태다. 레이돔의 보호막은 레이더의 성능을 저하시키지 않으면서도, 비와 눈과 바람 등으로부터 레이더를 보호할 수 있는 특수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레이더의 성능은 탐색거리와 정확성으로 가늠되는데, 이는 레이더의 크기와 직결된다. 따라서 동일한 기술 수준을 적용한 레이더라면, 레이돔의 지름이 클수록 고성능 레이더가 된다.

   
   
 
레이돔은 지상레이더뿐만 아니라, 항공기와 선박에서도 사용된다. 특히 정보 기술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현대전의 전투기에서 레이돔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일반적인 전투기는 앞머리에 레이돔을 장착하고 있으며,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미군의 공격용 헬기 AH-64 롱보우 아파치의 경우 주날개 위에 둥그런 레이돔을 달고 있다. 특히 공중경보통제시스템(Airborne Warning And Control System, AWACS)이라 불리는 조기경보통제기 E-3는 지상 10,000m 고도에서 공중지휘 통제소의 역할을 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핵심 장비가 기체 위에 탑재된 지름 9.14m의 원반모양 레이돔이다. E-3의 수색거리는 400km로 알려져 있으며, 탐지 범위 안에 있는 600개의 목표물을 분석해 그 중 200개의 목표물을 식별, 추적할 수 있다. 참고로, 서울에서 평양까지 거리는 230km에 불과하다.

나는 엽서에 인쇄된 흰 공의 사진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줬다. 우거진 잡풀 사이로 흰 공이 작게 보이는 사진이었다. 사람들은 대게 물탱크가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사진만 보고 대뜸 골프공 아니냐는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 갤러리 대표는 첫마디에 “아니 요즘은, 골프에 관한 작업도 하시나 보죠?”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사진은 마치 티샷을 날리기 위해 티펙 위에 올려둔 골프공과 꼭 닮았다.

   
   
 
○ 5. 골프공을 해체하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20세기의 마지막 순간, 월드뉴스가 되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화제의 주인공은 에셜론(Echelon Project).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비밀암호체계를 해독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체결한 협정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는 거대 첩보조직이다.

에셜론의 정체는 1988년 영국 언론인 던컨 캠벨에 의해 폭로된 이후, 1997년 영국 텔레그라프, 1999년 BBC의 심층 취재를 통해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지난해 EBS는 프랑스 카레레(CARRERE)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물 ‘비밀은 없다, 통신감청망 에셜론’을 방영하기도 했다.

   
   
 
요점은 이렇다. 에셜론 프로젝트는 미 국가안보국(NSA)의 주도로 영국의 통신본부(GHCQ), 호주 방위통신대(DSD), 뉴질랜드 통신안보국(GCSB), 캐나다 통신안보부(CSE) 등 앵글로색슨 5개국의 정보기관과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에셜론은 지상 기지와 통신위성, 고성능 신호인식 컴퓨터를 연결, 시간당 200만건, 매달 1억 건의 전화, 팩스, 이메일의 내용을 검색한다. 감시 범위는 지구 전역이다. 에셜론은 음성인식장치와 ‘딕셔너리’로 불리는 정보검색 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키워드가 들어가는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5개국 정보기관의 에셜론이 수집한 자료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에서 통합, 목적에 따라 분류돼 각국으로 전송된다. 이들 5개국 이외에도 미국을 도우며 감청망에 참여하는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한국도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5월, 유럽연합(EU) 의회는 보고서를 통해 에셜론을 ‘미국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은밀하게 운영을 주도하는 전자스파이시스템’으로 공식 언급했다. EU보고서는 기업간 계약 등 사업비밀을 전달하는데 전화 팩스 인터넷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통신센터에서 메시지 송수신과 자료수신 업무를 맡았다는 캐나다 통신보안국 전직 요원 프레드 스톡은 자신들이 국제적십자사, 그린피스, 국제사면위원회 등과 대인지뢰금지운동을 하는 다이애나 전 영국 황태자비, 교황까지 감시했다고 언론에 털어놨다.

에셜론의 정체를 다룬 수많은 매체들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를 비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영국 북요크셔의 멘위드 힐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미군 도청기지가 있는데, 이 기지는 걸프전 당시 중동 지역의 통신내용을 신속 입수해 미국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의 기지’상을 받은 바 있다. 이 기지에는 골프공 모양의 레이돔 22개가 있다.

한편 미국의 동맹국인 호주의 중부 사막지대에도 맨위드 힐 기지와 같은 최첨단 미군기지가 있다. 파인 갭(Pine Gap)이라는 이름의 이 기지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국가정찰국(NRO) 등이 합동 운영하며, 첩보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전파를 감시하고 있다. 이 기지에도 골프공 모양의 레이돔 12개가 있다. 언론에 따르면, 미국은 파인 갭 기지에 레이돔을 추가 건설해 미사일방어(MD) 체제의 인공위성 감시시스템(SBIS)을 구축할 예정이다.

영국과 호주의 평화운동가들은 골프공 모양의 기지를 그려 넣은 피켓을 들고, 기지해체 운동을 벌여왔다.

 

   
   
 
황새울 들녘의 골프공이, 에셜론이 운용하는 골프공과 같은 용도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군사전문가는 “만약 그렇게 중요한 군사시설이라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근거리까지 접근 가능한 곳에 설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기상관측 레이더일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실제로 레이돔은 기상관측을 위한 목적으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허나 기상관측 레이돔의 경우 황새울의 레이돔보다는 현저하게 작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울러, 인접한 오산 공군기지와 캠프 험프리 두 기지에서 수시로 정찰기가 뜨고 내린다는 점, 이들 미군기가 멀리 오키나와에서부터 북한지역까지 정찰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레이돔의 용도를 추측하기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설령 기상관측용이라고 해도, 이것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기상관측인가’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군사전문가는 “한반도에 있는 미 육군 기지 중에서 중요도를 꼽으라면 단연 평택일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왜냐하면 이곳이 통신감청의 핵심기지이기 때문이다. 미 육군은 이곳에서 통신정보수집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다. 겉으로는 중요성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미 육군으로서는 용산 미8군 기지보다 더 중요한 곳이 바로 평택일 것이다.”

그래서, 황새울의 골프공은 그리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 6. 유연

한미 양국은 용산 미군기지와 경기 북부 일대의 2사단 등 한강 이북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기지들을 평택으로 확장,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정부는 기지이전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비용의 대부분을 떠안았으며, 그 규모는 8조 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기지 재배치는 미국의 세계적인 군사패권 전략의 일환으로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이름 아래 주한미군을 아시아태평양 신속기동군화 함으로써 동아시아에 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한반도는 남북한 당국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군사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 밖으로 재배치된 미군이 첨단의 공군력을 이용해 언제든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한 양측의 전면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 일본 등 이해당사국 모두가 개입하는 국제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펜타곤의 생각은 주한미군을 아시아태평양 신속기동군화 함으로써 기존의 붙박이형 지역방어군에서 벋어나 선제공격 능력을 갖춘 미래형 기동군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은 이를 뒷받침하는 개념이다. 평택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실현시켜줄 요충지로 꼽히는데, 이미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는데다, 평택항과 오산공군기지를 끼고 있어 육해공군을 통합적으로 운용하고, 쉽게 군사력을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현실에서 적용되는 경우로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충돌상황을 꼽고 있다. 이 때 주한미군이 대만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하고, 중국은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한반도로 미사일을 쏠 것이라는 예측이다.

평화활동가들은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근간으로 하는 주한미군의 아시아태평양 신속기동군화가 필연적으로 한국군의 아시아태평양 신속기동군화를 강제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범위를 한반도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넓히는 일이며, 미군의 과거를 살펴볼 때 침략동맹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택미군기지 확장문제가 팽성읍 농민들만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경직성은 부정적 의미로, 유연성은 좋은 의미로 소통되는데, 전략적 유연성은 단어의 호감도를 빌어 나쁜 이익을 도모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 7. 사람들

다시 하얀 공으로 돌아오자. 하얀 공의 크기와 색깔, 용도 따위에 흥미를 갖지 않고도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아왔다. (대추리에서는 별 시답잖은 공에 호기심을 보이는 내가 되레 이상한 사람이다.)

이곳의 농부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비행장 건설로 집과 땅을 빼앗겼다. 해방을 맞아 이제 사람답게 사는가 싶었는데 전쟁이 터졌다. 1952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미군들은 불도저로 집과 농토를 뭉개버렸다. 사람 사는 집이 그러했을진대, 죽은 조상을 모셔둔 산소가 남아날 턱이 없었다. 세간을 챙길 틈도 없었다. 노인들이 놀라서 죽고,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죽었다. 산 아래 굴을 파고, 움막을 지어 초근목피를 씹어가며 목숨을 부지했다. 산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았다.

올해 일흔두 살 홍남순 할머니는 스물네 살에 팽성으로 시집을 왔다. 남편과 바다를 메워 “죽을똥 살똥 다 싸가며” 땅을 일궜다. 오남매를 키워 시집장가 다 보내고 살아온 것도 그 땅 덕분이었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 대추리 미군기지 철조망 옆 밭에 팥을 심던 홍남순 할머니는 “미군놈들 기지확장 문제 때문에 이 나이에 죽을 맛을 다 본다”며 울먹거렸다.

팽성읍 도두2리에 사는 예순아홉 살 문차분 할머니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지만 남편과 결혼해 어찌어찌 살다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래도 20년이나 살았으니 고향이나 진배없다. 농사지어 사는 것도 겨우겨우 사는 일인데, 집도 땅도 다 뺏기면 또 어디로 흘러들어 살아야 할 지 걱정이다. 이 말년에 말이다.

칠십 평생을 땅만 일구며 살아온 조창목 할아버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팽성 도두리 벌판에서 주최한 평화미사 도중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눈물로 토해냈다.

여든아홉 살 잡순 조선례 할머니는 해방 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대규모로 확장된 기지에 밀려 집과 땅을 빼앗겼다. 미군 불도저는 이주할 틈도 주지 않고 논밭을 짓이기고 담을 허물었다.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기만 했지, 한 마디 대꾸 할 줄 몰랐다. 할머니의 옛집 위에서 지금은 미군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지금 대추리는 진짜 대추리가 아니다. 밀리고 밀려와 가까스로 터를 잡은 가짜 대추리다. 진짜 대추리를 그리는 할머니의 꿈은 미군을 섬기는 이 땅에서 불온하다.

   
   
 
마흔넷 먹은 ‘젊은이’ 신종원 씨는 대추리에서 태어났다. 미군기지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건, 검은 연기건, ‘태어날 때부터 보고 들었던 거니까’ 좋고 나쁘고를 모르고 여지껏 살아왔다. “젊은 시절 이런저런 방황도 했지만, 고향이 좋고 농사도 잘만 지으면 먹고 사는데 큰 걱정은 없을 것 같아”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런 제길, 땅을 내놓으란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아버지 세대의 설움을 자식보고 이어가란다. 이런 염병할 짓이 또 있을까. 그는 요즘 농사일에 매달리지 못한다. 이 농사꾼에게 팽성대책위 조직국장이란 낯선 직책이 주어졌다.

“나는 대추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외지를 떠돌았어요. 그러다가 대추리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 열여섯 살에 다시 대추리로 돌아온 거예요. 나는 배운 것도 하나 없어요. 겨우 내 이름만 쓸 줄 알지, 누가 주소 좀 적어달라면 진땀께나 흘려요. 그래도 여기 대추리 사람들하고 오순도순 잘 살았어요. 13년 전에 남편이 죽고, 새끼들도 출가해서 다 외지에 사니깐, 나한테 남은 건 대추리밖에 없어요. 미군 비행기 소리요? 수십년을 귀에 박히게 들어온 거니까 암시랑도 안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무슨 소리만 나도 가슴이 벌렁벌렁 잠을 못자겠어요. 이제 쫓겨나면 어디서 살아야하나 싶고, 오만생각이 다 들어요. 새끼들이 나를 받아주기야 하겠지만, 누가 새끼들 짐이 되고 싶나요. 나는 그냥 내 평생 이웃하고 살아온 사람들하고 늙어죽도록 함께 살고 싶어요. 이게 내 소원이에요. 우리 마을사람들 진짜 너무 고생하고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예순아홉 살 김월순 할머니는 조용하고 수줍게 살아온 이야기를 건넨다. 미군기지 철조망 바로 옆에 살면서도 미군 미운 줄 모르고 살아왔다. 그 사람들 미워한다고 지난 과거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가만있는 우리를 쫓아내겠다니....” 할머니는 길바닥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이 바람 부는 들녘에서도 할머니는 빌고 또 빌었다.

삶의 터전을 잃을 지경에 놓인 사람들은 흰 공에 흥미를 가질 여력이 없다. 아무리 흉측한 물건이라도, 이 땅에서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모두 감수하고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리라.

○ 8. 얄읏한 공

얄읏하다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 없다. 나는 숱하게 공을 바라보면서 참 요상하고, 야릇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키워왔다. 이 공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미군기지확장 문제로 세 번이나 강제이주를 해야 할 위기에 처한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주한미군이 미웠다. 아주 얄미웠다. 덩달아 공도 얄미워졌다. 사람을 먹여 살려온 너른 들녘에 우뚝 솟은 흰 공은 사람 죽이는 일을 거드는 물건이었다.

이 얄미운 공을 녹여 호미를 만들고, 옷을 지어 입을 수는 없을까.

   
   
 
○ 9. 에둘러

나는 에둘러 갔다. 나는 여전히 위기에 몰린 이 마을 농민들의 삶과 국방부에 의해 처참하게 짓이겨진 들녘을 더 많이, 정면에서 찍고 있다.

언젠가 나는 ‘지구를 지켜라’라는 영화를 보고 울었다. 현실의 고단함 위에 영화적 상상력을 우스꽝스럽게 끼워넣은 영화였다. 어떤 친구에게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런 영화는 이제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 나름 비판적인 사고를 가진 친구였는데, 이제 그런 힘든 장면은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런 장면들로 인해 우울한 하루를 보내기 싫다는 얘기였다. 이런, 제길.

어찌 보면 내 사진은 다 그런 작업이다. 나는 그렇고 그러며, 이렇고 이런 내 작업 스타일을 버릴 생각은 없다. 그래도 정면성에서 오는 당혹스러움과 거친 느낌을 어떻게든 요리해야 할 필요는 느낀다. 그것을 살리는 방향이건, 살짝 틀어보는 방향이건.

그래서 에둘러 간 것일까. 암튼 나는 에둘러 갔다. 애달픈 농민으로 가지 않고, 빛나는 흰 공으로 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가지 않고, 전쟁광들이 쏘아올린 큰 공으로 갔다.

흰 공으로 먼저 갔지만, 흰 공과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온 황새울의 농민들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가기를 바랐다.(정면에서 다룬 황새울의 농민 이야기는 따로 풀어볼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황새울의 농민에게 흰 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황새울은 지금 공 타령 할 때가 아니다. 나는 다만 저 흰 공이 미군지를 상징하는 대리물이라고 상상했을 뿐이다.

나는 황새울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찍었던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의 얼굴 사진 600여 장을 엮어 크고 아름다우며,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둥근 공도 만들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흰 공 모양의 뻥튀기 하나를 받는다. 천천히 작품을 관람하면서 관객들은 흰 공 하나를 먹어 없앨 수 있다. 사람 죽이는 일을 거드는 흰 공은 사라져야 마땅하고, 사람을 먹여 살려온 황새울의 둥근 얼굴들은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는 노릇이다.

관객들은 나가는 길에 너무도 맛난 평택의 쌀, 황새울의 흰 공을 보면서 자란 쌀 한 줌을 사갈 수도 있다.
 

   
   
 
2006.5.12-5.23
신한갤러리(구 조흥갤러리)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출구
문의 02-722-8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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