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민주항쟁에 뒤이어 터져나온 7∼9월의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당시 언론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파업 확산의 기세에 밀린 초기의 ‘이유있다’던 동정론은 점차 ‘납득할 수 없는 폭력’에 대한 비난으로 변해갔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노동사회’ 8월호의 특집 <87년 노동자대투쟁 10주년>에서 노항래씨(정부투자기관노동조합연맹 연구실장)는 이렇게 평가했다. 노씨는 ‘언론을 통해서 본 97년 노동자대투쟁’이란 글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점차 고조됨에 따라 조변석개한 언론 보도의 흐름을 추적했다.

87년 7월 19일 한국경제신문이 1단 기사로 “현대미포조선에서 노조설립신고서 탈취사건이 벌어졌다”고 짤막하게 보도할 때까지만해도 언론은 노동자대투쟁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언론은 7월29일을 기점으로 일제히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근로자 농성 잇따라’(조선 7.29), ‘농성근로자 해산시키다 충돌-부산 국제상사 사무직 5백여명 기숙사 각목진입’(한국 7.31), ‘잇단 노동쟁의… 경제활동 찬물’(한국경제 8.1) 등의 기사가 잇따랐다. 연일 쟁의 관련 기사가 사회면을 장식했다. 이같은 노동자대투쟁 초기의 언론 보도에 대해 노씨는 “파업소식은 갈팡질팡이다.

‘진정국면 돌입’을 전하는 소식 다음날 대문짝만한 파업소식이 뒤를 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노동자 파업 투쟁이 ‘도미노 현상’처럼 번져나가자 언론은 본색을 드러냈다. 8월 28일 김정열 국무총리의 ‘좌경세력 척결 담화’ 발표를 계기로 언론은 노동자들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광산분규 조종 위장부부 적발, 철도점거-기물파괴 부녀동원 등 선동”, “현대중 근로자들 서류 불태우고, 회사본관 난입 닥치는대로 파괴”, “부평 대우자동차 농성자 관리직 사원 린치, 농성 계속” 등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불순세력의 개입과 폭력난동으로 몰아부쳤다. 이같은 언론 보도는 9월 5일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국기를 흔들 정도로 과격 양상을 보이고 있는 최근의 분규는 더 이상 순수한 노사문제로 볼 수 없다”며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본격화된 언론과 권력의 공세에 밀려 9월 초순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노씨는 이같은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 “전반적으로 당시 노동쟁의의 현상적 측면만을 부각시켰을 뿐 근본 원인인 노동법이나 제도적 차원의 문제를 파헤치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이같은 노동관련 보도의 문제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파업 등을 사건기사로 처리하는 데 익숙해진 언론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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