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승우 논설실장·한성대 겸임교수
“명찰 떼고 시위대를 까라!”
60년대 미국 경찰의 시위대 진압 모습이다.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시위대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위해 신원 확인을 할 수 없도록 한 ‘안전장치’가 명찰 떼기다. 민주사회의 경찰도 일단 ‘열’ 받으면 사나운 맹수가 된다.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누가 경찰의 법 집행을 감시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군사정권 시절 경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얼마 전 농민 두 사람이 시위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했다. 경찰청장의 낙마 등 한 바탕 소동 끝에 불법 시위나 집회를 막는 전·의경의 진압복에 이름표를 달게 할 방침이 발표되었다. 보수언론들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면서 반대하고 있다.
한나라당도 편을 든다. 폭력 시위가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진압 경찰에만 짐을 지우는 부당한 조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들은 공권력의 물리력 행사가 과도해질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러는 것일까?

명찰 부착은 ‘경찰폭동’ 예방 조치

미국에서는 60년대 들어 경찰감시기구들이 속속 등장했다. 월남전 반대나 킹 목사 암살 등으로 인한 가두시위가 격렬했고 경찰의 과잉 대응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67, 68년 LA, 시카고에서 발생한 시위 군중에 대한 대규모 경찰 진압이 대표적 과잉진압 사례다. 시카고에서는 시위 현장에 1만2000명의 경찰이 투입되었고 TV가 경찰의 폭력적 진압현장을 녹화 방영했다.

경찰은 시민 500여 명을 체포했는데 경찰과 시위대가 각각 100여 명씩 부상했다. 현장에 투입된 많은 경찰들은 시위대를 구타할 때 자신들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도록 명찰을 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사회비평가들은 ‘경찰의 폭동’이라고 불렀다.
미국 경찰은 경찰의 물리력 행사에 대한 지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위협으로부터 타인이나 경찰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고 합리적인 경우에 국한한다. 그러나 그 같은 지침은 존재하지만 실제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미국에서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조사하는 기구는 다양하다. 경찰서 내에 시민불만 신고를 처리하는 기구를 운영하거나 경찰과 독립적인 또는 일부만 독립적인 위원회가 가동된다. 이들 위원회는 시민들과 경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십여 년 전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대도시 50곳 가운데 32곳에 경찰 행동 감시 기구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기구가 경찰을 감시하는 데는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의 부적절한 공무 집행 조사에서 가장 큰 장애요인은 경찰이 동료 경찰에 의해 조사받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는 것이다. 동료 경찰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례가 흔하다.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일이 반복되었다.

민주사회에 맞는 시위문화

경찰의 부적절한 공무집행을 조사할 때 해당 위원회는 흔히 시민들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되는 경찰 쪽 증거를 접해야 했다. 위원회 위원들은 증거 불충분의 경우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거나 경찰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을 내는 경향이 강했다.

경찰이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하며 일상적으로 불법적 폭력이나 범죄를 다룬다는 면에서 경찰력의 과잉행사에 관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많은 탓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경찰을 감시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폭력, 불법 시위는 사라져야 한다. 민주사회에 맞는 시위문화를 도입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한 사회적 노력이 시급하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을 취하는 경우를 성찰,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위현장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감정적으로 격돌하는 집단행동을 보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시위대는 놔두고 경찰에게 부담만 주느냐 하는 식의 문제제기는 이제 거둬야 한다. 청와대에 경찰 모자나 보내는 식의 행동이나 이에 박수를 치는 일은 생뚱맞다.  민주사회에 소중한 공적 조직인 경찰의 존재 의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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