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상의 협조에 따른 엠바고(보도시점제한)는 어느선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서울지검 출입기자들이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부유층 해외도박 사건과 관련, 수사협조를 내세운 검찰의 엠바고 요청을 받아들였다가 집단적으로 ‘낙종’하는 사건이 발생해 엠바고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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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층 해외도박 사건을 서울지검 출입 기자들이 처음 포착한 것은 지난 7월 24일. 서울지검 기자들은 당시 외상명부를 소지한채 한국에 입국한 미 라스베이가스 미라지 호텔 카지노 한국인 고객 담당 로라 최 구속 과정에서 이 사건을 포착했다.

서울지검 외사부는 “관련 인사들에 대해 현재 수사를 하고 있으며 언론에 보도될 경우 이들이 도피할 가능성이 높다”며 서울지검 출입기자들에게 ‘엠바고’를 요청했다.

이 사건은 특히 지난 8월 4일 로라 최 ‘외상 명부’에 거명됐던 정원근 전 상아제약 회장이 2억 4천만원 규모의 외화를 탕진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연루된 고위 인사 10여명이 사법처리를 받으면서 검찰과 기자들간에 ‘엠바고’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기자들은 정 전 회장이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인사인데다 경제지 등이 이를 기사화할 가능성이 높다며 정 전회장에 한해 엠바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검찰에 전달했다. 이로 인해 정 전 회장 구속은 부유층 해외 도박 사건 차원이 아닌, 개별 사건 형태로 각 언론에 보도됐다.

그러나 시사저널이 김종배 국민회의 의원 수뢰 사건 수사 과정을 취재하던 도중 관련 사실을 포착해 20일 발매된 409호 ‘시사안테나’를 통해 보도하면서 ‘엠바고’가 자연스럽게 파기됐다.

결국 시사저널 보도보다 한달여가량 먼저 부유층 해외 도박 사건을 알고 있었던 서울지검 출입기자들은 ‘엠바고’에 발이 묶여 집단적으로 ‘물’을 먹은 셈이다.

서울지검 출입기자들은 20일 회의를 열고 “시사저널에 이 보도가 나간 만큼 더 이상의 엠바고는 무의미하다”며 기사화를 결정했다.

그러나 갑자기 ‘엠바고’가 파기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미확인 보도가 잇따르고 당초 검찰에 자진 출두를 통보해온 인사들도 언론보도 등의 이유를 들어 자수의사를 철회하는 등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전직 코미디언인 장고웅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사건 담당 부장이었던 서울지검 외사부 유모부장이 홍천지청장으로 좌천될 정도로 검찰내부에서도 ‘수사 처리 과정’이 문제가 됐다. 검찰도 엠바고 파기에 대한 불쾌함 탓인지 기자들의 취재에 상당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상황이 이처럼 꼬이자 서울지검 외사부는 또 다시 25일 두번째 ‘엠바고’를 요청했다.

외사부 박성득 부부장은 “언론의 추측보도가 잇따르면서 관련자 검거에 애를 먹고 있다”며 “조만간 사건 전모와 관련자들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니 당분간 일체의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 기자들이 이를 수용했다.

검찰 출입기자들은 검찰의 특성상 엠바고 요청을 거절하기가 힘들다는 입장이다. 대형 사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언론의 과잉경쟁이 수사의 진행 방향까지 ‘좌우’하는 부작용이 속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처럼 서울지검 기자실에 출입하지 않는다해도 각종 언론매체가 검찰을 상대로 활발한 취재활동을 벌이고 있어 언제든지 서울지검 출입기자들이나 검찰의 의지와 상관 없이 엠바고가 ‘파기’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엠바고 자체가 취재원의 편의에 따라 남발되고 있어 이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수사가 종결되고 1심 판결이 끝난 이후에야 엠바고가 풀리는 등 취재원의 편의에 의해 ‘엠바고’가 남발돼 국민들이 ‘묵은’ 정보를 접하게 되는 사례가 많다. 이번 사건 과정에서도 대전 동양백화점 오종섭 부회장이 엠바고가 풀리기도 전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기도 했었다.

서울지검에 출입하는 한 기자는 “검찰의 특성상 잦은 엠바고 요청이 불가피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의 수용 여부 자체가 지나치게 쉽게 결정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며 “향후 진지한 논의와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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