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소설 쓰기’가 재연되고 있다. 이번 소재는 오익제 전천도교 교령의 월북사건.

대다수 신문은 오씨의 월북 동기에 대해 ‘황파일’ 내사에 따른 도피행각으로 보면서 이같은 표현을 덧붙였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 “판단하고 있다”(이상 조선 18일자),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가능성이 높다”(이상 동아 18일자) “월북했을 것으로 보인다”(한국 18일자) 등등. 사실 관계가 분명치 않은 추측의 산물을 1면 머릿기사로 ‘과감히’ 올린 것이다.

신문의 ‘소설 쓰기’는 19일자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오씨 월북 이전까지만 해도 그 존재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가 적지 않았던 ‘황파일’은 기정사실이 됐으며 ‘간첩’ 오익제의 도피성 월북 ‘혐의’도 ‘사실’이 돼 버렸다.

그리곤 이를 기초로 제2, 제3의 오익제 출현의 가능성을 강력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황파일 대상자 극비 내사”(조선), “상당수 정치인 ‘황리스트’ 포함”(동아), “정치권 친북인사 조사”(한국), “북한 커넥션 쟁점화”(세계), “친북 정치인 내사”(경향). 각 신문은 이같은 1면 머릿기사 제목 아래 관계당국이 ‘황파일’에 이름이 올라있는 정치권 인사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일제히 전했다. 하지만 이날자의 보도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익명의 정보제공자에 의존한 보도였다.

이날자 보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대부분의 언론이 ‘친북 정치권 인사’의 온상으로 야권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경우 ‘황파일’ 대상자 중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주변인물이 포함된 것은 분명하지만 여권인사의 포함여부에 대해서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익명의 제보자의 말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 한국일보도 “국민회의 중진의원을 포함한 정치권의 여러 인사에 대한 내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는 여권 고위관계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비록 여권 인사의 ‘황파일’ 포함 가능성을 한줄 걸치긴 했지만 이같은 ‘받아쓰기’ 보도가 선거 때면 늘상 나타났던 ‘저격용’ 색깔론 보도의 일환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익명의 정보출처, 추측성 어법, 보도의 노림수 등이 과거의 선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와 다른 보도태도가 없진 않았다. 여야간 색깔론 공방을 기계적 균형미를 살려 보도했으며, 오씨 월북사건이 메카시즘 선풍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사설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같은 보도는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았다. 가히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는 1면 머릿기사 앞에서 이같은 보도가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한가지 특이한 점은 중앙일보가 ‘북풍 면역결핍증’에서 탈피해 한겨레와 함께 냉정한 보도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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