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제는 IMF의 요구 조건인 만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그동안 국내 언론이 사설 등을 통해 줄기차게 강조해 온 내용이다.

하지만 국내 언론의 이런 주장은 공교롭게도 최근 내한한 IMF 캉드쉬 총재의 발언에 의해 신뢰도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캉드쉬 총재는 지난 13일 노동계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리해고제 도입이 IMF 조건은 아니다”며 “정리해고제는 반드시 노·사·정 3자 합의에 따라 도입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같은날 있은 기자회견에서 “정리해고제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면 필요한 조처이지만 노동계 동의 없이 추진하면 심각한 사회적 후유증이 뒤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해고제가 IMF의 요구 조건이 아닐 뿐더러, 설혹 외국인 투자를 위해 정리해고제를 도입할 경우에도 노·사·정 3자 합의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캉드쉬총재는 정리해고제 도입의 시급함 보다는 노동계의 합의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국내 언론은 캉드쉬 총재의 지적을 애써 외면하려는 보도태도를 보였다.

주요 언론은 캉드쉬총재 기자회견 관련 기사의 제목을 ‘정리해고 도입 불가피(동아)’, ‘“정리해고 빠를수록 좋다”(중앙)’ 등으로 뽑아 보도하거나 “정리해고제 즉각 실시가 불가피해진 것은 IMF측과 국제자본이 노동시장 유연성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고서는 단기외채 상환연장, 대한 투자 제공과 기업 인수합병을 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기 때문(조선 15일자 사설)”이라며 정리해고제 도입 주장만을 되풀이했다.

“(정리해고제는) 한국정부 차원에서 국제신인도 회복을 위해 추진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는 캉드쉬 총재의 발언에서 확인되듯 사실 정리해고제 도입 논란의 물꼬를 튼 것은 김대중당선자측이었다.

김당선자는 당선 확정 직후인 구랍 22일 미국의 립튼 재무차관보가 내한했을 당시 “IMF 체제 아래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선 해고가 불가피하다”며 정리해고제 도입에 합의했다.

김당선자측은 그뒤 노·사·정 3자 협의 과정을 거쳐 정리해고제 도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한차례 번복하면서까지 정리해고제 도입을 강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언론 역시 김당선자측의 이런 태도에 편승해 ‘정리해고제=IMF 요구사항’이라는 도식을 널리 유포하면서 정리해고 도입의 불가피성만을 강변했다. 언론이 캉드쉬 총재의 발언대로 정리해고제가 IMF의 요구 사항인지, 정리해고제 도입이 불가피한 것인지 되짚어 보기를 기대하기란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이런 언론의 태도는 노동계로부터 과거에도 그랬듯 권력에 편향된 모습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민주노총의 정성희 대외협력국장은 “언론이 김당선자측의 주장에 따라 정리해고제 도입만을 강조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는 것이며 올바른 해법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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