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언론광장이 발행하는 '열린미디어 열린사회' 여름호에 실린 <밝혀져야 할 언론과거사> 기획연재를 필자인 김주언 전 언론재단 연구이사와 언론광장의 양해를 얻어 전문을 게재한다.

기획연재 1

밝혀져야 할 언론 과거사 - 한성순보 창간부터 60년 5·16쿠데타까지
김주언 / 언론인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찬반 논란을 일으켜 왔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과거사기본법)이 지난 5월3일 여야의 지리한 협상 끝에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올해 연말부터는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달 말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정식으로 발족함으로써 일제하 친일행위에 관한 조사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그동안 과거사 진상 규명을 둘러싼 논란은 무성했지만, 언론관련 과거사는 여전히 성역에 갇혀 있다. 밝혀져야 할 언론 과거사의 주요 내용은 일제하 언론의 친일보도 및 언론인의 친일행각, 권력에 의한 신문 정간 및 폐간, 언론인에 대한 테러 및 구속, 언론사 습격 및 통폐합, 언론인 강제 해직, 보도지침 시달, 언론사와 독재권력의 유착 등이 꼽힌다. 『열린미디어 열린사회』는 2회에 걸쳐 ‘밝혀져야 할 언론의 추악한 과거사’를 싣는다./편집자

일제하-해방-이승만-5·16, 신문 정간과 폐간, 기자 테러와 구속 수난

   
▲ 김주언 전 언론재단 연구이사
한국 언론의 수난사는 1883년 창간된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에서부터 시작됐다. 『한성순보』 제10호(1884년 1월30일자)에 실린 ‘화병(華兵)범죄’라는 기사와 제11호(2월7일자) ‘화병징판(華兵懲辦)’이라는 기사에 대해 중국이 조선 정부에 항의하는 조회(照會)를 보내온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검열에 의해 삭제되거나 압수된 기사가 많았다. 특히 일본은 한일합방 이전에 이완용 내각을 시켜 신문의 발행 정지, 압수 등을 규정한 광무신문지법(1952년 폐지)을 제정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일제의 언론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하 만주사변 이후에는 신문사들이 자발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나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언론자유를 보장했으나 여러 차례의 필화와 신문사 및 언론인에 대한 테러를 경험했다. 미군정의 언론자유 보장으로 신문사가 급증하면서 우익지, 좌익지, 중립지 등 세 부류로 구분됐다. 언론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출발했던 미군정이었지만, 국정이 시작된 지 두 달 남짓한 1945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정간 명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정간 이유로 ‘재정 조사’를 내세웠으나 일제 치하에서 조선총독부의 어용지였던 이 신문이 해방 후에는 사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미군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후에도 극우지로 알려진 대동신문,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등에 대해 정간 처분하고 언론인을 구속했다. 군중의 신문사에 대한 테러도 여러 차례 일어나 인쇄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1946년 9월부터 1947년 8월까지 테러단에 의해 습격 파괴된 언론기관은 11개소, 피습당한 언론인은 55명, 당국에 검거된 언론인은 105명이나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1946년 5월 29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꾼 군정법령 제88호 ‘신문급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것’을 공포했다. 1946년 조선인민보, 해방일보 등 좌익지가 무기 정간 당한 뒤 발행되지 못했고 1948년 5·10선거를 전후해서는 독립신보, 조선중앙일보, 국제신문 등이 모두 필화사건으로 무기 정간 당한 뒤 발행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언론과 권력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정부 수립 직후 몇 차례의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 9월 13일 이승만 정권은 제일신문을 정간시키는 동시에 부사장 김정형과 편집국장 엄흥섭을 검거했고, 이틀 뒤인 9월 15일에는 조선중앙일보를 무기 정간시키는 동시에 발행인 이달영 등 7명을 구속했다. 18일에는 세계일보, 12월에는 국민신문과 대한일보를 폐간시켰다. 이때까지 신문에 대한 필화는 사회의 혼란을 막으려는 당국의 노력이나 신문의 정론적 논조로 말미암아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론과 야당에 대한 탄압으로 볼 수 있는 첫 사건은 1951년 9월에 일어난 『동아일보』 필화였다. 발단은 9월 23일자에 실린 ‘김대운 조서발표 사건 중대한 국제문제 야기, 심대한 명예손상 ‘무’대사 정부에 항의서한’ 기사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관련돼 사형이 확정된 부사령관 윤익헌의 구명 운동을 위해 김대운(방위군 정훈공작원)라는 사람이 윤익헌의 처로부터 거금을 받아 무초 주한 미 대사를 비롯한 미국 고위층 5명에게 주었다고 진술한 김대운 자신의 경찰조서를 내무부가 국회에 보고했는데, 이에 대해 무초 대사가 우리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왔다”는 내용이었다. 공보처는 이 기사가 사실무근이므로 취소 기사를 요구했으나 동아일보가 묵살하자 검찰이 고재욱 편집인과 최흥조 취재기자를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고재욱 편집인은 다음해 구속됐다가 이틀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1952년은 정치 파동이 끊이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선거 이후 부산지검은 조선일보 부산분실 임시책임자였던 홍종인 주필을 구속했다. 조선일보 부산분실이 4명의 장관이 사임했다는 사실을 잘못 알고 속보판에 게시했다는 이유였다. 이 내용은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홍종인 주필은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4일 전 풀려났다. 이어 1955년 3월 17일 이승만 정권은 동아일보의 오식(誤植)을 문제 삼아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동아일보』 3월 15일자 1면에 실린 2단짜리 기사 ‘고위층 재가 대기 중 한미석유협정 초안’이라는 제목 위에 다른 기사 제목에 쓰기 위해 채자해 두었던 ‘괴뢰’라는 두 글자가 첨가된 데서 발단됐다. 검찰은 권오철 정리부장과 공무국 직원 현종길과 원동찬을 구속했고, 공보실은 3월 17일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1955년 9월14일 오후 4시15분경에는 대구시에 있는 매일신문사 공무국에 20여명의 괴한이 침입하여 문선케이스를 비롯하여 인쇄기계와 통신시설을 부수고 직원들을 구타하는 한편, 신문을 탈취하고 사장실 등을 돌아다니며 기물을 부수는 난동을 벌였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감행했고 경찰의 비호를 받았다. 이날 밤에는 ‘애국단체연합회’라는 명의로 “이적 대구매일신문에 대한 애국청년의 의거에 반항하는 인쇄출판업자가 있으면 역시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애국의 철퇴와 정의의 심판을 내릴 것”이라는 경고문이 뿌려졌다. 9월 13일자에 실린 최석채 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이 문제였다. 테러 사건 3일 뒤 대구경찰서는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최 주필은 한 달 만에 풀려나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1956년 5월 8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지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어 1959년엔 행정 조처를 통해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제2공화국 들어서는 정권의 언론탄압보다는 학생들과 일부 종교 신도들의 신문사 난입 사건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한국일보』는 5월19일자부터 정비석의 ‘혁명전야’를 연재했는데, 연세대 학생들에 대한 묘사에 불만을 품은 연세대생 400여명이 한국일보사로 몰려가 연좌시위를 벌였다. 한국일보는 연재를 중단했다. 6월1일에는 동아대 학생 약 1000여명이 ‘총장 배척 운동 동아대생들이’라는 기사에 항의하여 부산일보사를 습격했으며 같은 날 밤에는 청주대생 50여명이 대전일보사를 포위하고 ‘청주대 학생 또 실력 없는 교수 배척 데모’란 기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했고, 부산에선 3일 300여명의 상인들이 민주신보를 점거하기도 했다. 12월 10일에는 박장선 장로를 교주로 하는 신앙촌신도 600여명이 ‘미궁의 초소 말없는 증거물’(12월 6일자 석간)이란 제목의 “성화가 조작”된 것이라는 기사에 불만을 품고 동아일보사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했다.

   
▲ 조용수 사장 등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혁명재판소 공판 광경 ⓒ연합뉴스
1961년 5·16쿠데타 이후에는 언론인들이 무더기로 구속돼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며 신문 통신 등도 일제 정비의 된서리를 맞았다. 5·16쿠데타 이튿날인 5월17일 민국일보 이혜복 사회부장은 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됐다가 2개월 반 만에 풀려났으며, 1962년 1월21일에는 동아일보 정경부 이규행 기자, 3월9일에는 동아일보 사회부 남시욱 기자가 북한 괴뢰에게 선전자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4월20일에는 한국일보 사진부 정범태 차장과 이목우 사회부장이 반공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같은 무렵 동아일보 사회부 신용순 기자와 민국일보 사회부 조동오 차장이 수사기밀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같은 해에 있었던 가장 큰 필화사건은 8월에 있었던 동아일보의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논설로 인해 고재욱 주필과 황산덕 논설위원이 구속당했던 사건과 한국일보가 ‘신당 사회노동당으로’란 기사를 실었다가 발행인이 바뀌고 3일간 근신 휴간한 사건을 들 수 있다.

   
▲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 ⓒ 연합뉴스
쿠데타 세력은 5월23일 4·19혁명 직후 난립한 언론기관들에 대한 일제 정비를 단행하는 내용의 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 제11호를 공포했다. 이 포고령에 따라 서울에서는 일간지 49개, 통신 241개, 주간지 324개가 무더기로 등록을 취소당했고, 지방에서도 일간지 27개, 통신 64개, 주간지 129개가 등록 취소됐다. 건국 이후 행정권에 의한 최대의 언론계 수술로 일간신문 76개, 주간신문 453개, 통신 305개사가 폐간당한 것이다. 이 포고는 신문과 통신을 발행하려는 자는 필요한 시설을 갖춰야 하고 등록사항을 위반한 간행물은 취소할 것이며 당분간 신규 등록은 접수치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기자들에 대한 무더기 구속이 단행됐다. 전방계엄사령부 보도처는 5월 25일 사이비 기자 7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고, 서울과 경기지구 계엄사령부는 공갈 기자 3명을 구속했다. 28일과 29일에는 경남지구에서 120명의 악덕 기자를 구속했는데, 이들 가운데 21명은 공갈, 사기, 협박, 병역기피, 공문서 위조 등으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5·16쿠데타 이후 다음해 6월 22일까지 당국에 구속되거나 재판에까지 회부된 기자는 무려 960명이나 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1961년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조용수 사장을 사형시켰으며,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강탈’하여 5·16장학회를 만든다. 5·16장학회는 이후 ‘정수장학회’로 명칭이 바뀌어 현재 부산일보사 주식 전체와 문화방송 주식 30%를 소유하고 있다.

   
▲ 언론채록  ⓒ 이용호 화백  관련기사보기 : 진정으로 신문을 사랑하다 간 사나이
한국에 근대 신문이 도입된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발생한 언론관련 사건 중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으로는 일제하 언론의 친일행각과 이승만 정권의 경향신문 폐간 사건, 5·16쿠데타세력의 민족일보 폐간 사건, 정수장학회 사건(『열린사회 열린미디어』 2005년 봄호 참조) 등을 들 수 있다.     

일제하 언론의 친일행각
동아·조선 모멸의 발자취···최근 위암 장지연 친일 활동 논란도

일제는 한반도에 팽배한 반일의식을 탄압 일변도로 봉쇄하는 대신 신문을 통해 발산시키도록 함으로써 폭발을 방지하려 했다. 일제의 언론정책에 동원된 국내의 지주, 토호, 매판자본가에 의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민간지가 등장했다. 이들 신문은 출범 당시부터 체제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 신문들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실현한다는 근본적 문제보다는 문화적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만주사변이 발생한 1931년부터 일제의 언론통제는 전시통제로 강화되어 모든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36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제에 대한 ‘언론보국’이 경쟁적으로 심화하고 이들 언론은 1940년 폐간되기까지 5년 동안 한국 언론사에 지워 버릴 수 없는 모멸의 발자취를 남겼다. 징용과 징병, 신사참배 등을 통한 내선일체 정책의 실천에 앞장선 것이다. 1937년 이후 『조선일보』 신년호에는 일왕 부부의 사진이 1면에 등장하고 조선총독의 연두사, 총독부 정무총감의 소감이 실렸다. 1940년 신년호에는 『조선일보』 제호 위에 일장기가 올라갔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탄압으로 조선일보 지면은 획일화했지만 행간에는 민족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최근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로 우국지사로 추앙받던 위암 장지연 선생의 친일활동 자료가 공개돼 논란이 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1일 위암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6년 12월 10일치 2면에 ‘환영 하세가와 총독’이라는 한시를 실었다고 공개했다. 또 순종과 일왕의 만남을 두고 ‘일본과 조선의 융화’라며 반긴 글도 공개됐다. 위암의 친일단체 활동 경력도 새롭게 공개됐다. 위암은 불교진흥회라는 친일단체의 간사로 등록돼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암의 유족은 이 사실을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 김경현 연구원을 사자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했다.

   
▲ 강만길 광복60주년추진 민간위원장. ⓒ 연합뉴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러한 내용들을 검증해야 한다. 특히 의혹이 제기된 일부 언론사주의 친일행위도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사실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해당 신문사의 반발도 클 것으로 보인다. 강만길 위원장은 『내일을 여는 역사』 여름호에 기고한 ‘상식이 특종이 되는 세상’이라는 글에서 학계의 상식을 비틀어 쓰는 언론의 몰상식을 비판했다. 강 위원장은 “학계에서는 이미 상식이 된 문제들이 언론계에서는 아직도 특종이나 헤드라인 거리가 된다”고 꼬집었다. 강 위원장은 지난 4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김일성 전북한주석의 항일 빨치산 운동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는 질문에 “(김 전 위원장이) 항일운동을 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서 독립운동으로 봐야 하고, 사회주의 등을 따지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라고 대답했다, 당시 보수 정치권과 언론은 “김일성을 독립투사로 미화한다”며, 크게 문제 삼았다.

강 위원장은 “1930년대 이후 김일성 부대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는 그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많은 연구성과가 나왔고 이제는 하나의 상식이 됐으며, 한 보수언론은 보천보전투를 보도한 호외판 동판을 복제해 북한에 기증하기도 했다”고 그 글에 썼다.
보수언론들은 그동안 일제하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숨긴 채 민족언론으로 기능해 왔다고 주장해 왔다. 친일반민족 행위를 조사하는 데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5년 동아일보 정간, 대구매일신문 습격 사건과 1958년 함석헌 씨 필화 사건, 1959년 경향신문 폐간 등 물리력을 동원한 언론통제를 시행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등장한 제2공화국은 자유방임적인 언론정책을 시행했으나 5·16쿠데타 후 집권세력들은 보다 강압적인 언론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보도 사전검열은 물론, 민국일보 이혜복 사회부장의 유언비어 날조 혐의 구속, 민족일보 폐간, 언론기관 통폐합, 사이비기자 검거, 동아일보와 민국일보 필화 사건 등의 강압적인 언론통제 정책을 시행했다.

권력의 희생양, 경향신문 폐간 사건
이승만 정권 야당지 경향에 재갈 물리다

경향신문 폐간 사건은 해방 후 최대의 언론탄압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4월30일 당시 야당지였던 가톨릭재단 소유의 ‘경향신문’에 대해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하여 폐간 명령을 내렸다. 그해 1월 이후 경향신문이 사설과 칼럼, 일반 기사를 통해 허위사실을 보도하고 간첩 혐의자 공범의 도주를 도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와 동시에 사직당국은 편집국을 압수 수색하고 한창우 사장과 강영수 편집국장, ‘여적’난의 필자 주요한 논설위원을 연행하여 조사한 뒤, 주요한을 내란 선동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승만 정권이 폐간 명령을 내린 이유로 내세운 구실이 무엇이든, 실제 이유가 경향신문의 정권 비판적 논조에 있었음은 뚜렷했다. 1946년 천주교 서울교구가 창간한 경향신문은 기본적으로 보수신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말기의 독재체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였고, 특히 가톨릭 신자인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총에 맞아 부상한 1956년 이후엔 논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경향신문의 이런 야당 성향의 논조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고 이승만 정권은 점점 더 커지는 비판적 신문의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경향신문사는 폐간 명령이 떨어지자 행정처분의 취소소송 본안 및 가처분 신청을 냈고, 서울고등법원은 6월 26일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발행이 가능하게 됐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즉시 폐간 처분을 철회하고 무기 발행정지 처분을 내림으로써 발행을 불가능하게 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4·19혁명 직후인 1960년 4월 26일 대법원이 발행허가 정지의 행정처분 집행을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려 경향신문은 다음날인 4월 27일자로 복간됐다. 경향신문은 5·16 이후인 1962년 가톨릭재단이 경영권을 내놓은 뒤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가 1998년 사원주주회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경향신문 폐간 사건의 표면적이고 직접적인 발단은 1959년 2월4일자 단평칼럼 ‘여적’에서 비롯됐다. 문제의 칼럼은 『경향신문』 2월2일자부터 석간에 연재되고 있던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라는 글에 대한 단평이었다. ‘다수결의 원칙’은 미국 노트르담 대학 정치학 교수 페르디난드 A. 허멘스가 『소셜 리서캥 1958년 봄호에 발표했던 것을 일본에서 발간하는 잡지 『아메리카나』 1958년 11월호 첫머리에 일어로 번역 게재한 것이다. 원래의 제목은 ‘다수의 독재’(The Tyranny of the Majority)였다.

『경향신문』은 이 논문을 연재 중인 2월 4일자 1면에 “인민이 ‘성숙’되지 못하고 그 미성숙 사태를 이용하여 가장된 다수가 출현한다면 그것은 두말없이 ‘폭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다수결의 원칙이 ‘관용 아량 설득’에 기초한다는 정치학적 논리가 문제가 아닐 것이요,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 되느냐의 원시적 조건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선거가 진정 다수 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 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의 원칙일 것이나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

이 칼럼이 조간에 나간 뒤 이날 오후 4시 40분 서울시경 사찰과 형사 2명이 경향신문에 와서 편집국장 강영수를 연행했다. 경찰은 문제된 ‘여적’의 필자를 대라고 요구하면서 약 8시간에 걸쳐 심문한 뒤 이튿날 새벽에 돌려보냈다. 2월 5일 오전 9시 김일환 내무와 홍진기 법무, 그리고 전성천 공보실장은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해 이 사건에 대해 보고했다. 전 실장은 여적 사건은 사직당국에서 조사할 것이며 행정조치는 그 조사결과를 보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에 대해 어떤 강경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징조는 명백했다.

오후 6시40분경 시경 사찰과 분실장 김문석 경감이 사찰과 3계장 등 경위급 3명과 형사들을 데리고 경향신문사에 나타났다. 김 경감은 편집국장 강영수에게 서울지방법원 박승호 판사가 발부한 ‘국헌문란선동’(형법 제90조 제2항) 혐의의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했다. 경찰은 ‘여적’ 원고를 비롯하여 사설, ‘기자석’, 논문 등의 원고 40여점을 압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의 태도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3일 석간에 ‘수정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문제화된 여적 내용에 관하여’란 사설을 싣고 “언론자유의 수호를 위하여 불퇴전의 투쟁을 감행할 것을 선언하는 동시에 정부 당국의 맹성을 촉구한다”고 말하고, 이 사설은 폭력혁명을 선동하거나 암시한 구절은 추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던 ‘여적’ 필자 주요한은 6일 국회 기자실에서 문제된 글은 자신이 썼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지면으로 당국의 처사를 반박하는 한편으로, 7일 오전 압수수색영장의 발부와 집행에 대한 준항고를 제기하며 법으로 맞섰다. 준항고장은 ① ‘여적’란에 쓰인 진정한 다수의 결정은 선거에만 의존할 수 없는 국민감정이 깊어가고 있다는 현실이 한국 위기의 본질이라고 지적한 것인 만큼 범죄가 구성되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② 대법원의 선거소송 판결을 보더라도 선거 결과가 진정한 다수의 의사를 그대로 표현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압수수색영장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울지법 형사부는 10일 38건의 압수 원고 가운데 수사 진행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3건은 ‘합법적 압수’로 인정하고 나머지 모든 압수품의 환부를 명령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수사당국도 강경 대응으로 나왔다. 9일 밤 여적 필자 주요한을 형법상 내란 및 예비 음모 선전 선동 등의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서울시경은 주요한을 15일에 소환해 심문한 뒤 17일 2차로 소환하여 연금 상태에서 서울지방법원에 정식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이 영장의 처결을 보류하기로 결정하자 이튿날인 18일 경찰은 영장 신청을 자진 철회하여 수사는 사실상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검찰은 구속영장을 철회한 후에도 한국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등 편집국장을 불러 신문제작 과정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 이어 22일에는 서울지검의 조인구 부장검사가 스코필드 박사를 찾아가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들었으며, 25일에는 조 검사가 경향신문에 가서 신문 제작 경위와 관련한 현장을 살피는 등 신중하면서도 치밀한 수사를 계속했다.
 
‘여적’ 칼럼과 간첩 기사 필화 사건

마침내 사태는 다시 굴절했다. 2월 28일 조인구 부장검사는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과 여적 필자 주요한 논설위원에게 내란 선전(형법 제90조 제2항) 혐의를 적용하는 한편, 1월 11일자 석간 사설이 스코필드와 국회의장 이기붕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여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기소장에는 한창우와 주요한 두 사람이 ‘다수의 폭정’을 인용 게재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할 것을 선전했고, 1월 11일자 논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책임져야 할 사람은 깨끗이 책임져라’를 통해 이기붕과 스코필드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문제된 논설은 “2·4폭력 국회 파동을 전후하여 행정수반이요 자유당 총재인 이승만 박사가 멀리 진해 별저에서 유유자적했고, 자유당의 제2인자인 민의원 의장이 사건 직후 미리 준비했던 장문의 담화를 발표한 후 치료를 빙자하여 입원해 버린 것은 무책임 또는 무성의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 의장은 병구를 끌고 스코필드 박사를 친히 방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근련이 있었다 하거니와 그 동기는 아마도 스코필드 박사가 시내 모지에 기고한 극히 결렬한 비판문 때문이었으리라는 것도 상상되는 것이며, 동 박사가 의장의 ‘권고’를 격분한 어조로 거부한 데 대하여 어떠한 양심의 찔림을 받았는지 알고 싶은 일이다”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이 논설 중 이기붕이 스코필드를 찾아갔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져 경향신문은 이를 취소하는 기사와 사고를 내었으나, 검찰은 1월 11일자 논설과 2월 4일자 칼럼(여적)을 문제 삼아 발행인과 필자를 정식으로 기소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당 정권이 왜 끈질기게 경향신문에 탄압을 가하려 했던가. 경향신문에는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대통령 유고 시에는 계승권을 가진 부통령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이 1954년 무렵부터 고문으로 있었고, 주요한도 신파의 핵심 멤버였으므로 자유당의 경향신문에 대한 반감은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는 보안법 파동의 후유증이 가라앉지 않은 때여서 신문들은 대부분 보안법에 의한 언론탄압을 우려하고 이를 비판했다. 그 중에서도 경향신문은 가장 극렬한 반정부 논조를 폈다. 1955년 이후에는 집권당을 불쾌하게 만든 사건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 가운데는 사실에 입각한 보도도 있었지만 제작상의 실수 또는 오보로 인한 것들도 있어서 경향신문이 몇 차례 해명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1955년 1월 11일자 『서울신문』 사설 ‘정부 비판의 한계성’을 비판한 논전을 비롯해서 1956년에는 정읍 함평의 환표 사건을 폭로하여 정부여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이듬해에는 장면 부통령 피격 사건을 보도하는 가운데 ‘암시된 최종적 배후, 내무장관 이상의 인물’(1957년 2월 6일자) 제하의 기사가 문제되어 편집국장 정인준, 취재기자 김상순이 검찰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고, 검찰은 구속영장까지 청구하는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로마 교황청의 그레고리 오베루투 15세 아기니아니안 추기경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마닐라에서 열린 동남아 지역 마닐라 대회를 주회한 뒤 극동 여러 나라를 순방하던 길이었다. 3월 15일 전성천 공보실장과 외무·문교 양 장관은 아기니아니안 추기경을 방문하고 경향신문 문제를 논의했으며, 경향신문을 순수한 종교지가 되도록 종용하고 경향이 기소되기까지의 경위를 문서화하여 수교했다.

경향신문에는 이 밖에도 몇 건의 필화 사건이 일어났고 정부의 태도가 강경해지자 경향신문을 운영하고 있던 천주교유지재단은 정부와 세 차례 막후협상을 시도했다. 경향신문이 폐간된 후 행정처분 집행 정지 가처분신청의 공판에서 김철규 신부는 경향신문은 한창우와 주요한이 불구속으로 기소되던 날부터 공보실장과 협상을 시작했다. 천주교재단 측에서는 김철규를 새 발행인으로 내정하여 3차례 비밀접촉을 가지면서 경향신문 문제를 논의했다.

세 차례의 협상에서 공보실장은 발행인 변경과 필화 사건에 대한 사과문을 공고할 것 등을 요구했기 때문에 천주교 측은 3월 5일 발행인을 한창우 대신 김철규로 바꾸는 ‘정기간행물허가사항변경신청서’를 공보실에 제출했는데, 공보실은 3월 16일 경향신문에 되돌려 주었다. 경향신문은 정부당국과의 막후절충에 따라 대폭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이 인사이동으로 사건과 관련된 편집국 핵심간부는 물러나거나 정치관계 제작 업무에서 손을 떼게 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4월 4일 서울시경 사찰과는 경향신문 기자 두 명을 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여 당국의 경향신문에 대한 태도가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구속된 기자는 법조 출입 정달선과 시청 출입 어임영이었다. 영장 내용에 의하면 정달선 기자가 3월 28일자 석간에 간첩 염태식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기사와 4월 3일자 조간에 어임영 기자가 쓴 ‘간첩 하(河)를 체포’라는 1단기사가 새로 제정된 국가보안법 제21조 제4항(편의제공)및 동법 제24조(기록증거물의 효용멸실)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경찰은 두 기사는 간첩이 체포됐다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접선 계획을 세웠던 다른 간첩들이 도피했기 때문에 간첩 체포를 불가능하게 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와 함께 경찰은 편집국장 이관구와 사회부장 오소백도 불구속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수사를 진행 중이던 서울지검은 4월24일 어임영 기자를 구속 기소하고, 정달선 기자는 기소유예, 주필 겸 편집국장 이관구와 사회부장 오소백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여적 사건과 간첩 기사 필화 사건에 대한 기소와는 별도로 경향신문에 대한 폐간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행정 처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한창우 사장은 경향신문에 몰아닥칠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4월 30일 오후 진해에 체류 중이던 이 대통령과 이기붕 의장을 만나기 위해 진해로 떠났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정부당국의 방침은 확고했으며 폐간조치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같은 시간 주한미대사관 측도 적극적인 중재와 압력을 시도했으나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측은 대사관원 브룩스 매클루어가 공보실장 집무실로 찾아갔으나 비서들로부터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 폐간 조치가 발표된 후 다울링 주한미국대사는 김동조 외무차관에게 미국 외교관의 면담 요청을 거부한 것은 “한국과 미국 간에 존재하고 있는 긴밀하고도 우호적인 관계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미군정법령 위반 이유로 폐간 명령

이승만 정권은 4월 30일 오후 경향신문에 대해 폐간 명령을 내리고 밤 10시 15분 전격적으로 밀봉된 ‘경향신문 발행허가 취소에 관한 것’의 통고문을 경향신문에 전달했다. 폐간의 법적 근거는 미군정법령 제88호 위반이었다. 이 통고문에서 공보실은 경향신문의 폐간 이유를 5가지로 열거했다.

①1월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 허위의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정계의 혼란을 조장했고, ② 2월4일자 조간 ‘여적’란을 통해 허멘스 교수의 ‘다수의 폭정’이란 논문을 견강부회하여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동시에 폭동할 것을 선전했고, ③2월19일자 3면 ‘사단장은 기름 팔아먹고’라는 기사가 허위의 사실을 보도한 것이며, ④4월3일자 조간 ‘간첩 하(河)를 체포’라는 기사는 당국의 게재 금지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의로 게재함으로써 앞으로 간첩 하모와 접선하기로 되어 있는 간첩들의 도피를 용이하게 하였고, ⑤ 4월 15일자 석간에 이 대통령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법 개정도 반대’라는 제목으로 국가원수의 발언을 허위 보도했다.

공보실장은 이와 함께 장문의 폐간 이유를 밝히는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문은 “경향신문은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교구유지재단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으로서 불행히도 그 논조가 천주교 본래의 교지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정치 체제 하에서는 종교와 정치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동하여 절제 없는 정부 비난과 허위보도를 계속해 오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의 폐간은 정계에 커다란 충격이었음은 물론 주한미국대사 다울링도 즉각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다울링 대사는 “언론탄압이 언론의 과오를 교정할 방책은 되지 못 한다”며, “경향신문 폐간의 법적 근거가 된 미군정법령 제88호는 ”그 당시 한국치안을 위협하고 있던 공산 파괴선전을 막으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 법의 심판을 받기로 했다. 경향은 공보실장을 상대로 서울고법에 행정처분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행정처분취소 청구소장은 다음 세 가지 골자로 되어 있다.

첫째, 행정처분의 근거로서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한 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는 것으로서 동 법령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둘째, 설사 군정법령 제88호가 유효라 하더라도 이 법령은 1946년 5월 29일 공포 시행  당시 공산당의 파괴선전 언론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이 법령을 적용한 행정처분은 동 법령 본래의 목적을 일탈하여 악용한 것으로 법규 재량의 범위를 벗어나서 그 동기와 결과가 모두 헌법 제28조에 배치되는 위법 처사이다. 또한 정부가 열거한 이유 5개 항목 가운데 네 가지는 관계인이 기소되어 현재 공판에 계류 중이고 나머지 하나는 경찰이 조사 후 입건하지도 않고 해결된 것으로서 법의 확정판결을 보기도 전에 신문을 폐간한 것은 편견으로 유죄를 추정하는 것이며,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신문의 재산권과 언론 출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정신에 배치된다.

셋째, 동 행정처분은 정부의 행정재량권의 한계를 넘어 그 재량을 현저히 남용한 것이다. 경향신문은 이와 함께 현재 발행부수가 20만 2,875부이며, 본사 및 지국 종업원은 2,759명에 달해 그 가족을 통례대로 5인씩으로 추산하면 무려 1만 5,795명의 인수가 이 행정처분으로 인하여 실업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소원의 재결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후일 본소에서 승소한다 할지라도 경영상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것이므로 이 행정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이어 이튿날인 6일 오후 행정처분 집행을 정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이 사건에 대해 정계와 언론계 문화계에서는 강한 반발을 보였다. 민주당은 ‘언론탄압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으며 전국변호사협회도 언론탄압으로 규정했으며 염상섭을 비롯한 31명의 문인들도 경향신문 폐간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문편집인협회도 ‘민주사상 큰 치욕’이라고 규정하고 폐간의 철회를 요구했다. 서울신문을 제외한 신문들도 이 문제를 사설 해설 등으로 비판했다.

미국은 내정간섭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강경한 불만을 표시했다. 다울링 대사는 공보실장이 경향신문 폐간에 앞서 미국 대사관 직원의 면담을 거절한 사실을 공개하면서 한국 정부의 ‘비우호적이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공격했다. 워싱턴에서도 미국 상원 극동문제분과위원회가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소환하여 비밀심의를 한 끝에 다울링 대사의 성명을 지지했고, ‘워싱턴포스트’, 영국의 ‘가디언’, 일본의 언론들도 한국정부의 조치에 나쁜 반응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주미대사 양유찬이 워싱턴포스트가 한국의 내정을 간섭했다고 항의했고, 주일대사 유태하도 일본 언론계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의 폐간조치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어느 정도까지 간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5월 6이 경무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석상에서 이 사건을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법대로 잘  됐으면 되었다”라고 말했다고 전성천 공보실장은 전했다.

공보실장은 내외의 비판여론을 반박하고 5월 18일 “어떤 신문이 최근에 있었던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적 공공복지를 위해서 의법 조치해야만 할 것”이라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공방전은 5월 22일부터 국회 제33차 본회의에서 경향신문 폐간사건에 대한 대정부질의를 전개할 때 절정에 이르렀다. 사건 당사자인 주요한 의원은 그동안 경향신문과 전성천 공보실장 간에 막후협상이 있었던 경위를 폭로하고 공보실이 열거한 폐간사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폐간의 배후에는 자유당의 압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폐간 가처분신청 첫 공판 때 김철규 신부가 폭로한 막후협상 경위와 배후에 자유당이 있다고 시사한 것이나, 4·19혁명 이후 재판 때 전성천 스스로 이기붕의 지시였다고 밝힌 점 등은 서로 비슷한 내용이다.

서울고법은 가처분신청이 제기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6월12일 첫 공판을 열었으며 6월23일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서울고법 특별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경향신문 폐간의 법적 근거로 내세웠던 미군정법령 제88호는 그대로 유효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아무튼 경향은 폐간당한 지 만 57일 만인 6월27일자 조간부터 다시 발행할 수 있게 됐다. 경향은 즉시 이 소식을 찍어 호외로 뿌렸으며 속간호를 준비했으나 경향신문에 대한 ‘정간 처분’ 통고가 날아들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폐간 조치 정지되자 이번엔 무기정간

이날 오후 3시 법원 판결 직후 오후 6시 반 열린 임시국회는 장시간 논의 끝에 법원의 결정은 ‘폐간’ 조치가 너무 과도하다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법원의 의견을 존중하여 기와의 ‘발행허가 취소 처분’을 철회하고, ‘발행허가를 정지’한다”고 결정했다. 이로써 이승만 정권은 여론의 압력을 무릅쓰고라도 어떤 수단으로든지 경향신문의 발행을 중지시키려는 결심이 움직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경향신문의 법정투쟁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어 6월 29일 서울고법에 무기정간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냈다. 서울고법 특별2부가 맡은 경향신문정간처분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의 판결은 2개월이나 끌다가 8월 29일에야 결론이 났다. 법원은 이번에는 가처분신청을 ‘각하’해 버렸다. 이제 경향신문은 본안 행정소송의 확정판결이 있을 때까지 법률의 구제에 의한 속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의해 가려질 때까지 신문을 발행할 길이 막혀 버렸다.

경향신문은 본안소송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가처분 각하 결정’이 내려진 지 3일 후인 9월 1일 대법원에 항고했다. 이와는 달리 본안소송도 열려 가처분신청을 각하한 서울고법 특별2부는 9월 8일 경향신문발행허가정지행정처분취소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경향신문에 패소판결을 내렸다. 경향신문은 본안소송 패소에 대해서도 대법원에 불복 상고했다.

대법원은 연합부를 구성하여 이듬해인 1960년 1월26일에야 첫 심리를 열었고 2월 5일 두 번째 심리를 가졌다. 두 번째 심리에서 대법원은 군정법령 제88호 제1조 및 제4조의 위헌 여부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하기로 결정, 책임 회피의 구실을 만들었다. 헌법위원회는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대법관 5인, 민의원 의원 3인과 참의원 의원 2인으로 구성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참의원은 헌법에만 명시되어 있었을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참의원이 선출될 때까지 구성되지 못할 헌법위원회에서 경향신문의 운명을 결정해야 될 판국이었다.

대법원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때는 바로 3·15부정선거가 40일 앞으로 다가와 있을 때였다. 선거가 끝나기 전에 이 사건이 경향신문 측에 유리하게 마무리되어질 수는 없을 것이 명백했다. 더구나 전성천 공보실장은 1월28일 남원에서 선거 이전에는 경향신문 복간이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3월12일 대법원이 제청한 5명의 대법관을 헌법위원으로, 4명은 예비위원으로 임명했다. 민의원은 3명의 위원을 선임했으므로 모두 9명이 임명된 셈이다. 참의원 2명은 임명할 길이 없었다. 헌법위원회는 선거가 끝난 뒤인 3월 23일 첫 회를 열었으나 정족수 문제로 논란을 거듭한 끝에 사법부와 여당의 주장에 따라 정족수 11명을 채우기 위해 민의원에서 2명을 더 선출하기로 했다.

많은 논란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모두 관련됐던 이 사건의 긴 파문도 4·19혁명과 함께 가라앉았다.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온 날 오후 대법원은 경향신문 사건의 행정처분을 정지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대법원은 헌법위원회의 위원장인 부통령이 사임하여 현재로서는 신위원장의 취임 시기를 예측키 어려울 뿐더러 참의원에서 선출될 위원 2명을 민의원에서 선출키로 했으나 민의원에서 이를 선출하지 않아 위헌 여부를 조속히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원결정을 취소하고 본건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고 밝혔다.

폐간된 지 만 1년에서 4일 모자라는 4월 26일 죽었던 경향신문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지령은 4327호였다. 경향신문은 복간 첫 호인 4월 27일자 조간은 통단 제목으로 ‘반독재혁명은 개가를 올리다’에 ‘국회, 이 대통령 하야를 결의’를 부제로 달았다.

위헌성 여부가 논란의 핵심이었던 군정법령 제88호는 이후 민주당 정권이 1960년 7월 1일 ‘신문 등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면서도 폐기시키지 않았다. 이 법률은 신문발행의 허가제를 폐지하고 등록제를 규정한 것이므로 군정법령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군정법령 88호는 5·16쿠데타 이후 1961년 12월 30일 ‘외국정기간행물수입배포에관한법률’이 공포되면서 부칙으로 이의 폐기를 명시함으로써 법적으로 정식 폐기됐다.

경향신문은 복간됐으나 아직도 행정처분과 병행하여 다뤄졌던 사법 처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사건 역시 1960년 9월25일 검찰이 한창우 사장과 주요한 위원에 대한 공소를 스스로 취하해 버렸다.

박정희 정권 땐 권력의 압력으로 경매 처분

박정희 정권 들어서도 경향신문은 권력의 희생양이 됐다. 박 정권은 정권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이 눈엣가시였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 당시 폐간 사건 이후 복간된 이후에도 박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멈추지 않았다. 1967년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언론탄압 중 가장 큰 사건은 경향신문에 대한 경매처분일 것이다.

한일회담을 전후해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해 오던 경향신문은 1965년 4월 이준구 사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다음해 1965년 1월25일 은행 부채 4600만원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매에 처해져 버렸다. 한국편집인협회는 이 공매처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사건이 언론탄압인가 아닌가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발동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경매 처분에 있어 은행 측이 상세한 기준과 방침을 밝히지 않는 한 공신기관으로서 견지해야 할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 처사라고 비난했다.

당시에는 신문사마다 은행 빚이 없는 곳이 없었다. ‘경향신문’은 오히려 은행 빚이 적은 편이었으며, 재정적으로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있지도 않았다. 더욱이 은행 측은 부채의 이자나 원금의 일부를 갚으려고 해도 이를 받아 주지 않았고, 심지어 대표이사의 개인예금 인출까지도 거부했으며, 기관원이 매일같이 5, 6명씩 편집국에 몰려와 신문제작을 방해 간섭했다. 또한 경매처분에 단독으로 응찰하여 낙찰된 기아산업은 이미 경영난으로 은행관리 하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경향신문의 공매가 권력의 압력으로 소유 이전됐다는 주장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부비판지로서 적지 않은 흑자경영을 하고 있던 경향신문은 1967년 선거를 앞두고 기업주가 구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권력의 압력을 받고 소유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회에서는 야당인 김상현 의원이 “이번 경향신문 사건은 아무리 보아도 단순히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빚어진 매매행위라기보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력이 개입한 언론탄압 행위라는 증거가 뚜렷하다”고 주장하면서 증거물로 신문사 간부와 모 기관 간부와의 사이에 오고간 대화 내용이 담긴 비밀 녹음테이프를 제시했으나 경향신문은 경매 처분되고 말았다.

경향신문이 김철호 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신문 내용은 정부 논조로 급변했고 박 정권은 여기에 자신을 얻고 점차 본격적인 언론탄압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사법살인의 제물된 민족일보 사건
62년 창간한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집행은 사법살인 행위이다.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쿠데타 성공직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포고 제1호로 언론의 사전검열을 강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1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를 내세워 언론사를 통폐합, 76개 일간지가 37개로 줄였다. 폐쇄된 언론사는 월간지와 계간지까지 합쳐 1170개사에 달했다.

쿠데타세력은 이에 앞서 쿠데타 3일 만인 5월 19일 자신들이 내세운 ‘반공국시’에 반대하는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를 강제로 폐간시키고 이 신문사 사장인 조용수 씨를 사형시켰다.

민족일보는 1962년 2월 13일 재일 거류민단 조직부 차장 등을 지낸 조용수에 의해 창간된 혁신계 신문이었다. 조용수는 1960년 4·19혁명 이후인 6월 15일께 귀국하여 사장에 조용수, 취체역은 서상일, 이종률, 고정훈, 윤길중 등의 진용을 구성하여 실질상 혁신통합체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이 신문은 창간에 앞서 1월 31일 『한국일보』에 게재한 신문광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발간취지를 밝혔다. “전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열렬히 정력을 바치려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하는 민족적 애국자에 대하여는 가장 정열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신문이 창간되기 전인 1월 30일에 열린 민의원 본회의에서 민주당 소속 김준섭 의원이 민족일보를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창간 준비 중인 어떤 일간지가 재일본 조총련으로부터 자금이 들어와 설립된 것이라고 발언하여 자금 출처와 신문 성격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튿날 열린 본회의에서 통일사회당 소속의 윤길중 의원이 김 의원의 발언을 반박하면서 이는 민족일보를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신도 이 신문의 발기인 가운데 한사람이며 이 신문이 재일조련계의 자금이 유입되거나 그들의 조종에 의해 만드는 신문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윤길중 의원은 또 이는 “공포의식을 높여 혁신세력을 탄압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곧바로 정치문제로 비화했다. 1961년 1월 31일 이 문제에 대한 당국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해 열린 내무위원회의 비공개회의에서 신경돈 내무부장관도 경찰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민족일보의 창간을 준비 중이었던 조용수는 2월 2일자 『한국일보』 광고란에 게재한 해명서를 통해 민족일보의 자금은 결코 조련계의 것이 아니라며 “앞으로의 본지 운연자금 구성에 있어서 재일 한국인 교포들의 민족애에 불타는 깨끗한 성금들도 도움이 될 것이거니와 미주, 구주, 기타 전체 해외동포들의 성금도 그 일부를 차지할 것을 믿고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조용수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조달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고 강조했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13일자로 창간호를 발행했다. 사시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등 네 가지였다. 인쇄는 당시 국무원 사무처의 정부관리기업체였던 서울신문사와 계약을 맺고 발행했다. 그러나 지령 18호까지 발행했던 2월28일 국무원사무처가 서울신문에 대해 민족일보의 인쇄중단을 지시하여 3월3일자부터는 신문 발행이 중단됐다.

이로 말미암아 3일간 휴간한 뒤 3월6일자로 발행한 속간호에서 『민족일보』는 ‘제2공화국언론자유탄압 제1호’라는 대형 컷을 1면 머리기사로 싣고, ‘절대 자유 보장하겠다던 장 내각 집권 반 년 만에 국민기본권 유린’이란 부제로 이 사건에 대한 보도와 함께 당국의 언론탄압이라는 주장으로 1면 전체를 채웠다. 

민족일보는 과감한 논설과 보도로 창간하자마자 선풍적인 독자의 관심을 끌어 한달도 채 안돼 당시 유력지였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에 버금가는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당시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이 2만4000부 정도 발행하고 있었는데, 민족일보는 5만부를 발행, 당시 민족일보의 규모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민족일보는 5·16군사쿠데타 이전 장면 정권과도 빈번히 충돌해 정부는 민족일보를 인쇄하는 서울신문에 압력을 넣어 신문 조판 도중 인쇄를 중단하는 탄압을 받기도 했다. 

조용수 사장, 조봉암 사형반대 운동에 앞장

민족일보를 발행한 조용수 사장은 1930년 경남 진양 태생이다. 그는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해방 후 학원마저 좌우익으로 갈라져 있을 때 그는 우익학생 모임인 ‘학연’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좌우익 학생들의 갈등이 심해 조용수는 진주중학을 자퇴하고 대구 대륜중학으로 전학해 졸업했으며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대륜중학 졸업 및 연희전문 입학동기이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 간 조용수는 재일학도의용군 귀국대열에 섞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메이지 대학 정경학부에 편입한 조용수는 민단에서 일하면서 민단기관지인 ‘민주신문’과 교포신문인 ‘국제타임스’ 논설위원으로 언론인의 길을 닦았다. 1956년에는 재일동포 북송반대 운동, 1959년에는 조봉암 사형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조용수는 조봉암 사형반대 운동 때 만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이영근씨를 만났다. 이영근씨는 죽산 조봉암이 국회부의장 시절 비서로 있다가 조봉암이 사형에 처해지자 일본으로 밀항해 반이승만 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이영근씨는 당시 동포들을 상대로 주간 동포신문인 ‘통일조선일보’를 만들고 있었다. 이영근씨는 조용수의 인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조용수는 국내로 들어와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당시 최석채 ‘대구 매일신문’ 주필, 양호민 ‘사상계’ 편집위원 등 진보적 인사 상당수가 진보정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부분 낙선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조용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평화통일론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발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이때 사람들을 소개하는 등 도움을 준 사람이 이영근 씨다.

5·16쿠데타가 발생하고 3일 뒤 구속선풍이 불어 닥치면서 계엄사령부는 5월19일 민족일보의 폐간을 공고하고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민족일보사 간부 8명이 모두 연행됐다. 치안국은 5월 22일 조용수가 1958년 1월 간첩사건으로 병보석 중에 일본으로 도피한 바 있던 조봉암의 비서 이영근의 지령 하에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하면서 혁신지도자와 혁신정당 및 기관지 발간에 열중해 왔다고 말하고, 민족일보는 조총편계로부터 들어온 약 1억 환의 불법 도입자금으로 발간되어 괴뢰집단이 지향하는 목적수행에 적극 활약해왔다고 발표했다.

쿠데타세력은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특별법 제6조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선동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고, 특히 3년 이상 소급 적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혁명검찰부는 7월 23일자로 관련자 13명을 기소했다. 기소된 13명은 사장 조용수를 비롯하여 송지영(한국전통사장), 이종률(취체역), 안신규(상임감사), 정규근(상무취체역), 양수정(편집국장), 김영달(업무국장), 김승택(총무국장), 조규진(기획부), 이상두(논설위원), 이건호(논설위원), 양실근, 장윤근 등이었다.

혁명재판소의 재판과정은 요식행위였다. 육국대령이 재판장인 혁명재판소는 군인들이 판사들의 뺨을 때릴 정도였다고 한다. 7월 29일 혁명재판소 심판2부가 맡은 첫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재판관할에 관한 이의를 신립했다. 민족일보는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아니라 상법상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이므로 검찰관이 특수범죄처벌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다룬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변호인 측의 관할권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8월28일 열린 공판에서 혁명재판소 심판2부(재판장 김홍규)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및 형법 등을 적용하여 조용수, 송지영, 안신규 3명에 사형을 선고하고, 이상두(15년), 양수정·이건호(10년), 정규근·양실근(5년)에 실형을 선고했다. 판결내용은 이들이 북한이 주장하는 남북협상 경제 서신 문화교류 및 학생회담 등을 적극 추진하고 이를 선전 선동하여 반국가단체인 이북괴뢰집단의 활동을 고무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전 대통령후보는 당시 갓 임관된 판사로 혁명재판소에 차출돼 심판관의 한 사람으로 8월 28일 사형선고 판결문에 서명했다.

조용수의 사형판결 소식이 전해지자 해외에서는 구명운동이 뜨겁게 일어났다. 세계언론인협회(IPI)는 한국 정부에 항의문을 전달했으며, 국제 펜클럽 본부도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에서는 조용수구명운동위원회. 민족일보사건 진정위원회 등이 만들어져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이보다 앞서 국내의 문단과 언론계 인사 104명도 진정서를 냈다.

해외 언론에도 조용수 사장의 사형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반국가 행위로 언론인을 처형하고 무기징역에 처하는 것은 박 장군이 정착시키려는 한미관계 개선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고 지적했고, 영국의 맨체스터 가디언은 사설을 통해 ‘증거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공산주의를 조장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것은 범죄임에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혁명재판소 상고심은 그해 10월31일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조용수 사장과 안신규, 송지영 3명에 대해서는 원심대로 사형을 확정하는 한편, 이종률·양수정·이건호·이상두 네 피고인에 대해서는 원심을 파기하고 이종률·이상두 두 피고는 징역 10년, 양수정·이건호 두 피고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조용수 사장은 12월 22일 사형이 집행됐고  안신규와 송지영은 무기로 형이 감면됐다. 다음해인 1962년 1월 국제기자협회는 조용수 사장에게 ‘국제기자상’을 추서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송지영은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동북아인사로는 처음으로 사면후원자로 결정돼 1969년 출감했다. 그리고 문예진흥원장과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광복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리고 ‘간첩’ 이영근은 그 후 서울을 자주 방문하는가 하면 자신이 경영하는 ‘통일조선신문’(후에 ‘통일일보’) 서울지사를 두기도 했다. 1991년 그가 사망하자 한국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간첩이라던 사람에게 훈장 추서

간첩이라던 사람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한 것은 사실상 민족일보와 조용수의 사형이 잘못이었음을 정부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조용수 사장은 아직도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1998년 12월20일 조용수 사장 37주기 추도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했다. 이들은 당시 판결문을 검토해 봤지만 사형으로 몰고 갈만한 증거가 없다며 ‘사법살인’이라고 주장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재심청구를 위해 재판기록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어느 곳에도 없었다. 얼마 전 재판관계 서류의 소재를 유추할 단서를 찾았다. 모 잡지사에서 조용수의 교수형 집행 사진을 공개했는데 그 사진 뒷면에 중앙정보부 고무인이 찍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정원에 민족일보 재판관계 자료를 요청했는데 자료의 일부가 왔다. 자료는 당시 치안국에서 민족일보를 내사한 문건으로 페이지를 보면 많은 양의 자료 중 일부만 보내온 것이었다.

최근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이 조용수 사장의 사형판결과 재판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밀보고서를 본국에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가 지난 4월21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6쪽짜리 ‘민족일보 재판’이란 보고서를 보면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 정보소식통을 인용해 “민족일보가 통일 반제 등을 주창한 건 사실이지만, 그 구성원들이 (친북) 노선을 고의적으로 따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1심에서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진 뒤인 1961년 9월26일 작성돼 본국 국무부로 보낸 것으로 최근에 비밀 해제됐다.

미 대사관은 “이영근이 실제로 공산주의 공작원이라는 강력한 징후가 있다”며 “(그러나) 일본의 한국기업인이 정치적 확신 보다는 투자를 위해 돈을 지원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미 대사관은 또 이 보고서에서 수사와 재판과정이 공정했는지에 대해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미 대사관은 “재판 자체의 결과를 살펴보더라도 여러 의문이 일어난다”며, “(한 예로) 민족일보와 긴밀히 연결된 몇몇 사람은 기소되지 않았고 일부는 아예 체로조차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민족일보 사건은 조용수 사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40년째 되는 해 국회에서 일부 불거지기도 했다. 2001년 4월 15일 당시 자민련의 송석찬 의원은 “이회창 총재가 판사시절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반국가단체 동조혐의로 사형시키는 등 언론탄압에 앞장섰다”며, 정계 은퇴를 요구했다. 이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조용수를 죽음으로 몬 당사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지금의 김종필 자민련 총재”라며, “권력의 힘에 의해 민족일보가 처리됐는데 법원 명령에 따라 파견된 판사가 뭐가 문제인갚라는 공박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김자동)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민족일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면서 김 명예총재의 진상규명 협조를 촉구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이 사건 1심판결에 참여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솔직하게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고 이 사건을 재평가하는 작업에 앞장서야 한다”면서 ”정부 여당도 역사적 진실규명을 위해 재판 관계 자료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참고문헌>
 
· 송건호·최민지·박지동·강명구·윤덕한·손석춘 공저,『한국언론 바로 보기』, 2000년 3월 17일, 다섯수레.
· 한국기자협회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 편, 『80년 5월의 민주언론-80년 언론인 해직 백서』, 1997년 5월 18일, 나남출판.
· 김민남·김유원·박지동·유일상·임동욱·정대수 공저, 『새로 쓰는 한국언론사』, 1993년 8월 23일, 도서출판 아침.
· 송건호·임채정·김학천·김종철·이태호·정연주·정대수·강대인·김태홍·고승우 공저,『민중과 자유언론』, 1984년 12월 31일, 도서출판 아침.
· 정진석 저, 『한국 현대언론사론』, 1985년 1월 10일, 전예원.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편, 『자유언론』, 2005년 5월 17일.
· 고승우, 「파당적 이해관계 떠나 과거 물어야」, 『신문과 방송』 2004년 10월호, 한국언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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