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전 장우성(1912∼2005) ⓒ 연합뉴스
지난 1일자 아침신문들은 한 거장의 죽음을 알렸다. 한국적 문인화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월전 장우성(1912∼2005)의 타계 소식이었다. '신인문화 개척자', '화단의 산증인', '한국미술의 살아있는 역사' 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한 거장의 죽음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참으로 극진해 장우성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마저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지난해 '리커란-장우성전'을 보고 그의 필력에 감탄한 적이 있지만 그의 타계 소식은 기자에게 '한 미술거장의 죽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타계 소식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그가 85년 그린 '흉하게 부어오른' 유관순 영정이었고, 그의 '친일'전력이었다. 
 

   
▲ 1986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제작한 유관순 열사 표준영정
'한국화의 거목'이자 '친일화가'이기도 한 그의 부음이 3·1절 신문을 장식한 것을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그의 타계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 3·1절 월전의 '친일'에 침묵하면서 민족정기 운운하는 신문들을 보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에 가까우니까.

장우성의 '친일' 침묵한 언론

<한국화에 '현실' 접목 '신문인화' 개척 업적>(경향)
<문인화 대가 월전 장우성화백 타계 충무공영정 등 대작 남겨>(국민)
<일 영향 벗은 독자적 한국화 개척>(동아)
<시·서·화 능통 최후의 선비화가>(서울)
<그의 붓은 한국화 역사였다>(조선)
<시와 글씨로 조형미 살린 새 문인화풍 열어>(중앙)
<운보와 수학…'마지막 문인화가'>(한국)
<현대 문인화 이끈 '거목'>(한겨레)

   

▲ 동아일보 3월1일자 24면.

   
▲ 한국일보 3월1일자 A17

각 신문의 제목을 보면 언론의 각별한 애정을 걸러내더라도 그 누구도 그가 한국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언론의 찬사일색 보도에는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도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리는 데 바빴던 걸까? 그의 부음기사에선 '사실'이 빠져 있었다. 월전의 '90년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의 친일활동인데, 언론은 지면 할애에  지나치게 인색했다. 한 사람의 공과를 엄정하게 다뤄야하는 책무를 저버린 것 같다.

"친일 시비에 휘말리며 불편한 만년을 보내기도 했다."(경향)

"…친일작가 논란이 불거지며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한국)

"최근 친일작가라는 논란까지 불거져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친일시비는 장 화백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겨줬다."(서울)

"일본 총독부의 요청으로 수상자를 대표해 답사한 것을 빌미로 친일파라는 오명을 받는가 하면…"(국민)

"최근 일부에서 친일시비로 유관순 영정 교체 논란이 일기도 했다."(세계)

"일제시대부터 활약한 월전은 역시 친일 시비를 피해가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친일화가 파동 때는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경기도 이천시가 추진중인 월전미술관 건립 계획 발표 직후, 또 삼일절을 앞두고 유관순 열사 영정 문제를 놓고 다시 친일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이미 병석에 누운 상황이었다."(조선)

"월전은 광복 전 선전에서 각광받는 등 일제시대에 활동한 전력 탓에 광복 후 '친일미술가'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이에 대해 "광복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바른 길을 오지 못했구나'싶어 일본 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중앙)

   
▲ 한겨레 3월1일자 21면.
"시인 서정주와 함께 수학한 동료 화가 김기창처럼 작가적 성취와 별개로 친일경력 시비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족쇄였다. 이당 김은호를 사사하면서 일본풍 채색화로 선전 등 일제 관전에 다수 입상했고, 해방 뒤 문인화풍으로 돌연 화풍을 바꾼 이력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를 큰 어른으로 존경했지만 재야미술계는 그를 친일 경력을 덮은 처세주의자로 비판했다."(한겨레)

대부분의 언론에게 그의 친일행각은 그의 명을 재촉한 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일부 언론은 '일부'라는 표현을 써 그의 친일을 한때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보거나 철저히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등 친일전력을 감싸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친일'이라는 단어를 아예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친일전력을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대신 동아일보는 <일 영향 벗은 독자적 한국화 개척>이라는 제목을 부각시키며 민족문화를 일군 민족화가의 면모를 강조했다.

이밖에도 "일제 강점기 한국화의 정체성 혼란 속에서도 전통에 대한 강직한 신념과 한국화의 예술적 가치를 근대적 발상으로 재창조하여 동양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그의 노력은 1942년 선전 최고상에 빛나는 '창덕궁상' 수상으로 한국화 거장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다"(세계) 등의 보도에서는 최소한 역사의식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난 2001년 친일화가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음기사와 비교해 월전의 부음기사에서는 그의 병세악화 원인으로나마 '친일'을 언급하긴 했으니 진일보한 것이라고 해야할까?)

결전미술전 출품 등 월전의 '친일행적'

   
▲ 지난해 10월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개최한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전. ⓒ 이창길기자 photoeye@meidatoday.co.kr
월전은 41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42년과 43년에 창덕궁상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이를 '왜색화풍'과 함께 그의 친일행적의 대표 사례로 꼽지만 미술사학계에서는 그의 친일행적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한다.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1943)과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1944)의 작품 출품과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의 답사내용(1943)이 그것이다.

최열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학술이사(미술평론가)는 "결전미술전은 일제가 군국주의와 황국신민화를 고취시키기 위해 연 전시회로 일제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다. 일제는 이 미술전에 김인승 박은성 심형구 이국전 윤효중 김경승 등과 같이 친일활동을 활발히 한 작가들을 엄선해 참여시켰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결전미술전 목록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월전은 결전미술전에 '항전'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추정된다(결전미술전목록의 인쇄상태가 나빠 작품명은 정확지 않다).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의 답사는 월전의 또 다른 친일행적으로 거론된다. '매일신보'는 1943년 6월16일자 신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1943.6.15.)을 다루며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해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며 장우성 화백의 답사내용을 보도했다.

그러나 최열 이사는 "일제시대 친일행적도 문제지만 장우성 화백의 더 큰 문제점은 1983년 그가 보인 행태였다"고 그의 친일행위 부정을 비판했다. 1983년 초 9명의 미술평론가는 '계간미술'(봄호)에 '한국미술의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미술계의 친일을 비판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월전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같은 해 4월 일간지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내고, 백상기념관을 빌려 규탄시위를 열었다. 월전은 성명에서 "일제 잔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가를 일반에게 묻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하며 친일미술과 자신에 대한 비판을 부정했다.

최열 이사는 '과거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그의 태도가 그의 자서전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최 이사는 "월전은 1982년 펴낸 회고록 <화맥 인맥>에서 조선전람회 답사와 관련해 '고맙다. 정진하겠다'고 짤막하게 답사했다고 썼다. 그러나 <화맥 인맥>을 개정해 2003년 다시 펴낸 <화단 풍상 70년>에서는 이 대목을 아예 빼버렸다"고 말했다.  

3·1절 일제 비판하면서 친일 행적 침묵

'위안부' 발언, '독도' 발언 등을 비롯해 일본 극우인사들의 몰역사적인 발언으로 한국 언론은 조용할 사이가 없다. 어느 날짜 어느 신문을 펼쳐들건 간에 일본을 규탄하는 더 나아가 일본의 식민잔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언론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만세를 외쳤다는 3·1절을 전후해 일제와 일본에 대해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국내 인사의 친일행적 사실을 싣는 데 꺼리면서 말이다.

언론이 국내의 친일잔재 규명에 앞장설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내 '거장'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는 것만은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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