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서열을 전제한다. 상대와 나의 위치를 파악해 높임말과 낮춤말을 적절히 골라야 한다. 비민주적인 표현도 많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지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아 여전히 독재의 유산이 언어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언어에도 신분이 있다. 표준어는 나머지 지역어(방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 언론은 그동안 이러한 한국어의 특징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지 못했고 오히려 널리 유포해온 책임이 있다. 미디어오늘은 저널리즘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2023년 한국 사회에 어울리는지 살펴보고, 저널리즘은 언어 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언어 저널리즘’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 편집자주

<양금덕 할머니 “대통령 옷 벗으라”…野 외통위 단독 진행>
<“미쓰비시 돈 받아낸다” 다시 소송 나선 양금덕 할머니>

각각 지난 13일 KBS, 지난 16일 MBC 기사 제목이다. 최근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해법’을 내놓으면서 관련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다. 피해자 목소리도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피해자를 부르는 방식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보도할 때도 똑같이 발생했던 일인데 언론에선 ‘양금덕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로 표기하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이 피해자를 가리킬 때 ‘OOO 할머니’라고 쓴다. 

미디어오늘은 이전 기사 <뉴스 호칭에 녹아있는 전관예우를 없앨 수 있을까>에서 언론이 호칭에 서열을 만들어 예우하고 싶은 대상에는 ‘이름+직함(직업)’으로 하고 그게 아니면 ‘이름+씨’로 표기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두환은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기에 일부 언론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닌 ‘전두환씨’라고 하는 것이나 대통령 배우자에 ‘여사’가 아닌 ‘씨’를 붙이면 지지자들이 항의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동원 피해자를 이용수씨나 양금덕씨보다 ‘이용수 할머니’나 ‘양금덕 할머니’로 표기하는 건 언론에서 그들을 예우하기 위해 붙인 호칭으로 볼 수 있다. 기사 본문에서 처음 등장할 때는 ‘양금덕 할머니’로 쓰고 그 다음부터는 ‘양 할머니’라고 쓴다. ‘이 할머니’, ‘양 할머니’. 어딘가 좀 어색하지 않은가. 

▲ 지난 16일 MBC 뉴스 화면 갈무리
▲ 지난 16일 MBC 뉴스 화면 갈무리

 

할머니, 공론장에서 배제된 여성노인의 상징

할머니는 내 부모의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다. 가족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이 보편적인 여성노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확대된 것이다. 영어에서 내 부모의 어머니가 아닌 여성노인을 가리킬 때 Ma’am과 같은 말을 쓴다. 하지만 한국어에는 여성노인을 지칭할 단어가 없다. ‘어르신’이란 말은 남성에게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고, 통상 미디어에 등장하는 65세 이상은 주로 남성 전직 국회의원과 같은 기득권층이다. 평범한 사람, 사회적 약자로서 노인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언어가 없으면 그 존재도 없다. 가족관계를 벗어난 여성노인을 지칭한 표현이 없다는 건, 여성노인이 공적 영역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족관계에서 사용하는 ‘할머니’를 가져와 ‘양금덕 할머니’라고 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일상에선 ‘선생님’ 등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뉴스에서 ‘양금덕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 역시 어색하다. 

영화 <69세>를 보면 여성노인의 발언이 얼마나 거대한 장벽에 갇혀서 신뢰받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69세의 여성이 29세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어떠한 2차 피해가 발생하는지, 실화를 모티브로 그렸다. 치매를 의심받아 성폭력 존재 여부를 의심받거나 젊은 남성을 꼬셨다며 오히려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사건에선 범죄 증거가 있는데도 가해자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내가 아이거나 젊은 여자였다면 그놈이 구속됐을 것”이란 내용이 유서에 있었다. 

▲ 영화 '69세' 포스터
▲ 영화 '69세' 포스터

 

2018년 미투운동이 한창일 때도 여성노인의 미투를 찾기 어려웠던 까닭을 이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적 영역에서 배제됐다는 건 이들의 문제나 목소리가 사회문제로 공감받거나 공론장에서 고민해야 할 대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노인이라는 소수성이 중첩되면서 많은 여성이 성폭력을 말하는 분위기에서도 소외됐다. 

여성들이 받는 차별은 개인이 예민한 문제가 아니라 젠더의 구조적 문제라는 주장,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여기서도 적용해야 한다. 여성노인의 사적인 것도 정치적이다. ‘할머니’를 대체할 말이 필요하다. 

결혼하면 발생하는 불평등한 가족 호칭

보통 가족관계는 사적영역으로 분류되지만 대다수 가족에게 적용되는 문제는 공적영역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가족내 젠더 불평등은 꽤 오래된 사안이다.

▲ 1966년 2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
▲ 1966년 2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

 

 

1966년 2월17일 동아일보에는 <네 살배기 ‘애기씨’>라는 독자 기고문이 실렸다. 독자의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 네 살짜리 시누이한테 ‘애기씨’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하소연을 담았다. 해당 독자는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시고, 손아래 시누와 시동생은 내 동생처럼 사랑으로 다루어야 한다. 하녀가 아닌 바에야 동생들에게 도련님이니 작은아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가족적이고 친근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50년 이상 흐른 지금 기고로 봐도 무방할 만큼 고질적인 문제다. 

결혼하면 여성과 남성은 서로의 가족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호칭을 보면 동등하게 연결되지 않았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성쪽 집안은 시‘댁’이고 여성쪽 집안이 처‘가’다. 시가와 처가로 부르자는 제안이 나오는 이유다. 여성은 ‘아버님’, ‘어머님’이라며 남편 부모님에게 실제 부모를 높이는 호칭을 쓰지만 남성은 ‘장인어른’, ‘장모님’이라는 별도의 호칭을 통해 자신이 직접적인 자녀가 아니라고 밝힌다. 

동아일보 독자기고에서 보듯 여성은 손아래 시누이(남편의 여동생)를 ‘아가씨’,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남편의 남동생)을 ‘도련님’으로 부르는데 이는 신분제 사회에서 하인이 주인집 자녀를 부르던 말과 같다. 남성은 아내의 여동생을 ‘처제’, 아내의 남성형제를 ‘처남’으로 부른다. 아내가 남편 형제자매를 높여 부르는 것과 달리 남편은 장인어른, 장모님처럼 아내쪽 가족일 뿐이라며 일종의 선을 긋는 형식의 호칭을 쓰게 된다.

시‘댁’에서 며느리를 부르는 말과 처‘가’에서 사위를 부르는 말도 차이가 있다. 시‘댁’에선 며느리를 ‘새아가’, ‘며늘아가’라며 ‘아가’ 취급을 한다. 며느리를 높여부르는 호칭은 없다. ‘얘야’나 ‘너’로 부르는 집도 흔하다.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 순식간에 ‘에미야’로 바뀐다. 처‘가’에선 사위에게 ‘김 서방’ 등으로 높여 부르는 호칭이 있다. 장인·장모 입장에서 사위는 늘 어려운 손님이라는 뜻의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속담도 있다. 

▲ 결혼하면 상대 배우자 가족과 관련해 시대착오적이고 낯선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사진=pixabay
▲ 결혼하면 상대 배우자 가족과 관련해 시대착오적이고 낯선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사진=pixabay

 

시‘댁’과 처‘가’의 이러한 불균형은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새아가’에겐 반말이 붙고, ‘O서방’에겐 ‘~하시게’가 따라붙는다. 남편 형제의 서열대로 각 배우자의 서열도 결정된다. 형님(남편 형의 부인)이 나이가 어려도 존댓말을 써야하고 형님은 손아래 동서에게 반말을 쓴다. ‘처제님’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처럼 처‘가’쪽 호칭엔 대부분 ‘님’이 붙지 않는 반면 시‘댁’쪽 호칭엔 ‘님’이 붙거나 어울린다. 

가족내 성차별의 문제는 호칭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1978년 4월18일 경향신문 <남녀불평등 여전히 깊다>란 기사를 보면 김복길 당시 한성여대 교수의 논문 ‘한국인의 양성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고 있다. 1975~1977년 서울 주요 일간지에 실린 부고 500여건을 조사한 결과, 남편이 사망했을 때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남았으니 죄인이라는 뜻의) 미망인으로 표기한 경우가 42.8%(334건 중 143명), 처(妻)로 표기한 경우는 불과 0.9%(3명), 아예 기재하지 않은 것은 56.23%(188건)로 나타났다. 또 유족을 기재할 때 아들만 쓴 경우가 49.9%(255건)에 달했다. 

어색한 호칭이 가져온 불통

도련님, 아가씨도 그렇지만 여성이 남편의 형에게 ‘아주버님’이라고 부르거나 남편 여동생의 배우자에게 ‘서방님’이라고 하는 것은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최근 결혼한 부부의 경우 서로의 형제자매, 그 배우자들과 만남에서 호칭이 어색해서 아예 대화를 걸지 않거나 호칭을 생략한 채 본론만 말하는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A씨는 오랫동안 연애하던 연인과 결혼했는데 이전부터 남편(남자친구) 남동생의 이름을 ‘누구야’라고 불러왔다. 그러다 결혼하면서 하루아침에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A씨는 “입에서 도저히 ‘도련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 호칭을 부르지 않고 명절 때만 도련님이라고 불렀는데 남편이 듣기에도 민망했는지 그냥 다 같이 이름을 부르자고 제안했다”며 “남편도 내 여동생한테 이름을 불러오다가 처제라고 하기 어색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A씨는 “남자친구의 동생이어서 이름 부르던 때와 달리 결혼 초 도련님으로 부르고 그쪽은 나한테 ‘형수, 형수’ 이렇게 하는 것 자체로 (도련님이) 조금 건방지게 변한 것 같았다”며 “결국 모두가 ‘OO씨’라고 이름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A씨와 그의 남편 형제자매들 간 이름 부르기로 한 합의에 대해 시어머니의 이해도 구했다. 

호칭이 어색하면 소통에 제약이 있다. 최근 결혼한 B씨는 배우자의 형제자매를 부를 때 “호칭을 쓰지 않고 그냥 할 말만 한다”며 “서로 나이대나 관심사가 비슷해서 소통은 하지만 호칭이 어색해서 부르진 않는다”고 했다. A씨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안부를 수시로 묻고 카톡을 자주하며 소통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도련님 잘지내세요’라고 통화를 시작했다면 전화하기 부담스럽지 않나”라고 했다. 

비교육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가족관계상 서열로 인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하대하는 표현을 쓰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집안 아이들이 보고 자라기 때문이다. A씨는 “아버지 세대를 보면 이제 눈치 주는 어른이 없지만 그러한 호칭에 익숙해져서 고치지 않는다”며 “집안 아이들이 보는 게 교육적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 배우자 형제자매 관련 부분. 자료=국립국어원
▲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 배우자 형제자매 관련 부분. 자료=국립국어원

 

가족단위에서 호칭 변화를 끌어낸 A씨는 사회적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A씨는 “당시 국립국어원에서 ‘도련님’ 같은 호칭 대신 ‘OO씨’로 부르자고 권고하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는데 이러한 권고가 우리 가족이 실제 호칭을 바꾸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국립국어원은 2017~2018년 연구를 바탕으로 지난 2020년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라는 책자에서 “배우자의 동생을 ‘○○씨’와 같이 이름을 넣어 불러 친근함을 드러낸 것처럼 배우자 동생의 배우자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면 ‘○○씨’로 이름을 부르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적인 관계로만 치부됐던 가족·친족 간 시대착오적 호칭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 참고문헌
신지영, 언어의 높이뛰기
신지영, 언어의 줄다리기
장슬기, 그런 말은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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