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사는 큰이모가 이번 폭설에 낙상사고를 당했다. 눈 쌓인 인도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서울 성북구의 30대 지인도 빙판길에 낙상사고를 겪었다. 이마가 찢어졌다. 우리 고향의 노모도 며칠 동안 눈 속에 고립됐다. 시골이라 고귀하신 제설차 따위는 행차하지 않았다. 마냥 방치된 채 성탄절에 성당에 가질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저 도로는 눈을 치워주는데, 우리집 길은 왜 안 치워주는 거야?”

작년 이맘 때도 우리 노모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자동차 도로는 눈을 치워주고, 왜 사람 다니는 길은 그냥 놔두냐는 것이다. 노인들이 다니고 아이들이 학교 가는 길인데 아무도 치워주지 않아 팔십줄에 접어든 당신이 삽으로 눈을 퍼 간신히 길을 냈단다. 병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아니나다를까 역대급 폭설이 내린 올 겨울, 노모의 질문이 사방에서 외마디 비명처럼 터져나온다. 인도는 왜 치워주지 않냐는 불만과 원성. 시골은 난파선처럼 좌초되고, 도시의 보도와 골목길은 빙판길로 변해 행인들이 대책없이 비틀거리고 다치기 일쑤였다.

▲부산지역에 안전사고에 대비한 제설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부산지역에 안전사고에 대비한 제설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그런데도 각 지자체 도시의 제설 정책은 그저 자동차 도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노인, 장애인, 학생, 여성 등 교통약자들이 눈 쌓 인도 위에서 위태롭게 곡예를 하든 말든, 시민보다 자동차 안전에만 골몰한다. 지난 24일 하루에만 151건의 낙상사고가 발생한 광주시에는 골목길과 인도의 눈을 제거할 수 있는 2.5t 이하 제설기가 단 1대도 없었다. 인도 제설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뜻이다. 또 어느 도시는 인도용 제설기를 수입했는데, 이를 사용할 줄 아는 공무원과 매뉴얼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제설 관련 조례라고 해봤자 가게나 주택 소유자들이 현관 앞 인도를 치워야 된다는 기이한 조항밖에 없다. 시민들이 걸어다니는 인도는 사유재가 아니라 공공재다.

도대체 왜 사람의 길은 치우지 않는가?

몇 년 전부터 시행되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성평등 제설 정책’도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국 자체 조사에 따르면, 인도의 제설 비용이 겨울철 낙상사고 비용보다 더 적게 든다.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보다 인도에서 다친 사람이 3배라고 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대중교통과 인도를 더 많이 이용한다. 인도 제설에 힘을 쏟는 것이 성평등을 제고하고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학교와 버스정류장으로 이어지는 인도만 제설해도 아이들, 장애인, 노인, 여성 등의 교통약자들의 형편이 훨씬 나아졌다. 그렇게 스톡홀름에서는 눈이 쌓이면 사람이 다니는 길부터 제설한다.

“형평성 문제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과 장애인은 목적지에 접근할 수 없어 겨울철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시민들이 편안하게 걷을 수 있는 건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보행자 우선 네트워크’를 마련한 미국 미니애폴리스 시는 2023년까지 프로그램을 확장할 계획이다. 버스와 경전철까지 이어지는 인도는 물론 거리의 모퉁이까지 제설해 유색인종, 저소득층, 장애인의 이동성을 높이게 된다. 미니애폴리스가 실시한 ‘겨울 보도 유지 연구’는 꽤 주목할 만하다. 미국 대부분 지역의 인도 제설 조례와 법령이 주택이나 상가 소유자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는데, 이같은 제설 정책이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는 연구였다. 아무리 벌금으로 규제되어도 사정상 제설을 못하는 주민이 있을 뿐 아니라, 단 한 주택만 제설을 안 해도 해당 인도는 위험한 사고 지역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국이 일괄적으로 인도를 제설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폭설에 옷깃을 여미는 행인들. ⓒ민중의소리
▲폭설에 옷깃을 여미는 행인들. ⓒ민중의소리

한편 덴마크에서도 차도보다 자전거 도로를 먼저 제설한다. 자전거 유저 인구가 많기도 하지만, 시민 안전에 주안점을 두는 탓이다. 눈 쌓이는 날마다 2톤 남짓의 작은 제설기가 자전거 길을 뚫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캐나다에서도 몇 년 전부터 자동차 도로와 인도를 나란히 제설한다. 누가 인도를 제설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쟁 끝에 시 당국이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도 ‘인도를 제설하라(Plow The Sidewalks)’ 캠페인이 한창이다. 벌금 부과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시 당국이 직접 눈을 치우라는 것이다. 또 뉴질랜드와 일본처럼 지열과 태양열을 이용해 인도에 열선을 까는 나라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낙상사고 비용보다 열선 비용이 더 저렴하다.

제설은 그 도시의 우선 순위를 드러내는 지도와 같다. 자동차 도로만 제설하고 인도는 그대로 놔두는 지금의 제설 정책은 우리 도시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효율성과 속도에 중독돼 정작 시민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기이한 공간이라는 것을 적시한다. 도시에서 ‘걷다가 다치거나 죽는 것’, 그건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의 완벽한 실패다.

1920년대만 해도 도시의 길은 모두의 길이었다. 사람, 자전거, 말, 소, 자동차 등이 함께 공존했다. 심지어 전기로 구동되는 이동수단이 활기차게 개발됐다. 하지만 석유와 자동차 기업들의 로비로 도로와 고속도로가 정비되며 사람과 자전거가 쫓겨났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 도로와 주차장 등 도시 공간의 50% 이상이 자동차 위주로 배분되어 있다. 철저히 자본 축적에 용이하게 설계된 자본주의 도시 모형이 유일한 도시 형태인 것처럼 점차 전 세계에 구조화된 것이다. 자동차를 빠르게 굴려야 석유도 더 뽑아 쓰고, 공장 기계도 더 빨리 회전시키는 효율성의 극대화, 그것이 최우선의 가치인 사회에선 사람과 생명이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위기와 기후변화를 경유하며, 이제서야 다시 ‘사람을 위한 도시’에 관한 담론과 질문이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광장 관리자들이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광장 관리자들이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사람의 안전과 공공성보다 효율성과 속도에 강박된 한국 사회는 그 질문이 더디게 생산될 수밖에 없다. 폭설에 자동차가 멈추면 재난이 되지만, 약자들이 고립되거나 빙판길 위에서 다치거나 죽는 건 순전히 개인의 운으로 치부된다. 또 스쿨존과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냉대처럼 여전히 교통약자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눈엣가시처럼 비난하기 바쁘다. 하기사 닥치는 대로 공공서비스를 축소하고 사람의 안전을 이윤의 먹잇감으로 던져넣는 신자유주의 좀비들이 윤석열 정부 아래 빼곡히 관직들을 차지한 세상 아닌가.

길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과 삶을 잇는 관계의 통로다. 이 통로가 배제된다는 건 곧 삶이 배제된다는 뜻이다. 확실히 우리는 사람을 위해 눈을 치워달라는 이야기가 생경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니 사람 다니는 길을 제설하지 않는 이유를 중단없이 질문해야 한다. 인도를 제설하면, 도시의 공공성도 향상시키고, 보다 안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으며, 제설 관련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다. 이 기이한 세계의 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눈송이처럼 계속 질문을 퍼부어야 한다.

사람의 길은 왜 치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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