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애를 취재하기 위해, 100여명의 주변 인물들을 만난 기자, PD들이 있다.

19세에 한약사 시험을 통과해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으로 평생을 지역의 인권, 문화, 역사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진주의 ‘큰어른’ 김장하 선생. 그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절대 자신의 공적을 밝히지 않고, ‘자랑이 될 것 같은 말’에 대해서는 누가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등록금, 하숙비, 생활비 등 지금껏 셀 수도 없이 많은 장학금을 지원했지만, 어떠한 전달식도 열지 않아 장학생의 정확한 규모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는다. 누구를 도와도 보도자료 등을 일체 내지 않고, 언론사 인터뷰도 응하지 않아 어떠한 기사도, 사진도 찾기 어렵다.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취재의 ‘주인공’은 평생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30년 전 이미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인터뷰를 포기한 적이 있고, 김현지 MBC경남 PD도 2년 전 다큐멘터리 촬영을 포기했다. 기자, PD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7년간 김장하 선생의 일대기를 취재해 온 김주완 기자는 100여명의 주변 사람들을 만났다. 김 기자에게 협업을 제안해 작년 11월부터 촬영을 시작한 김현지 PD은 30여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 부산, 경남 등 전국 각지로 이동도 많이 했다. ‘김장하 장학생’이었던 우종원 일본 사이타마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일본까지 찾아갔다.  

각자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모습, 경험이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이번 취재기를 책 ‘줬으면 그만이지’로 펴낸 김주완 기자,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담아낸 김현지 PD에게 김장하 선생에 대한 ‘퍼즐을 맞춰나갔던’ 생생한 취재 이야기를 들었다. 

 

“칭찬도 하지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봐주기만 했으면” 

공식 인터뷰를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취재는 보통 외곽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김장하 선생에게 ‘그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왜그러셨습니까’라고 묻는 식이다. 김주완 기자는 2015년 ‘풍운아 채현국’이라는 책을 출간한 뒤 초청강연이 있던 날, ‘김장하 선생의 기록을 남겨야한다’는 사람들의 주문을 들은 직후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더 여유롭고, 자유롭게 취재하기 위해 조기퇴직을 선택하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도 선생에 대한 취재는 이어졌다. 김 기자는 선생이 하고있는 모임에 참석하거나, 함께 등산을 따라갔다. 인사를 핑계로 댁으로 찾아가 몇마디 여쭙기도 했다. “나도 이런 방식의 취재는 처음이었다. 보통 어떤 사람의 생애사 인터뷰의 경우,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길게 진행하는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김 기자의 말이다. 

▲ MBC경남 '어른 김장하'. 김주완 기자(왼쪽)와 김장하 선생. 사진=MBC 경남 제공.
▲ MBC경남 '어른 김장하'. 김주완 기자(왼쪽)와 김장하 선생. 사진=MBC 경남 제공.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PD들의 취재는 더 어렵다. “다큐를 만들겠다고 마음 먹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인터뷰해달라고 조르지 않겠다, 몰래 찍지 않겠다, 영웅화하지 않겠다’ 이렇게 세 가지를 약속하면서, ‘다큐를 만들고싶습니다’라고 했다. 선생님은 ‘안된다, 된다’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냥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카메라 들고 올게요’라고 하고 도망갔다. 그 다음부터 김주완 기자를 앞세워 뒤에 카메라를 대고 들어갔다.” 김현지 PD의 말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냥 막무가내로 치댔고, 선생님도 봐주셨던 것 같다. 나중에는 선생님이 ‘같이 밥먹으러갈까?’라고 하셨다.”

카메라를 자꾸 들이대면 쫓겨날까 강약조절에도 신경썼다. 일을 떠나서 선생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카메라 없이도 자주 선생을 찾았다. “카메라 없이 갔는데, 선생님한테 수십년전에 장학금을 지원받은 분이 인사를 하러 와서 급하게 핸드폰으로 찍은 적도 있다. 선생님의 주변인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다가 “김장하 선생님 절대 인터뷰 안하시는데 어디서 이렇게 사기를 치냐”라며 보이스피싱범으로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김현지 PD의 말이다.

“칭찬도 하지 말고, 나무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봐주기만 했으면.” 매일같이 찾아오는 기자와 PD들을 내치지 못한 선생님의 한 마디였다.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하지 않기 위해’ 김 PD는 영상에서 내레이션을 다 뺐다. 인터뷰이들이 경험한 것들 위주로만 오디오를 채웠다. PD의 시선이 가급적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 MBC경남 '어른 김장하'. 김장하 선생. 사진=MBC 경남 제공.
▲ MBC경남 '어른 김장하'. 김장하 선생. 사진=MBC 경남 제공.

“전혀 다른 방식이었음에도 이번 취재과정이 제일 재밌고 즐거웠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분은 꼭 기록으로 남겨야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고있는 작업을 격려해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 그 과정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김주완 기자의 말이다. 

닮고 따라가고싶은 사람, ‘어른’ 김장하의 이야기

김현지 PD가 붙인 다큐멘터리의 이름은 ‘어른 김장하’다. ‘어른한테도 어른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이다. “김주완 기자가 ‘닮고 싶은 사람이 어른’ 이라는 말을 했었다. 사람들이 꼰대는 싫어하지만, 어른을 기다리지 않는 건 아니다. 자기가 따라가고 싶은 어른을 계속 찾고 있다. 그 열망에 대답해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영상은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김장하 선생의 활동을 조명했고, 책은 이에 더해 7년간 취재한 선생의 생애사를 더 구체적으로 담았다. 

김장하 선생은 열아홉에 한약업사 자격을 얻어 1963년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 진주로 이전해 50년간 운영했다. 김 선생은 한약방을 운영해 번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았다. 그는 평생 자가용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다.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그는 대신 지역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다. 1984년 명신고등학교를 개교했고, 10여년 간 이사장을 하다 1991년 국가에 기부했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 주주·이사로 참여했는데, ‘진주신문이 지역의 토호세력이 겁을 내게끔 역할을 해야한다’며 아무 조건없이 매달 후원했다.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고, 2000년에는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다.

이외에도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등을 지내며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지원도 지속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공부를 돕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는 김 선생의 신조대로 걸어온 삶이었다.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 여성운동에도 힘쓴 김장하 선생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이번 취재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다. 특히 김장하 선생은 여성평등기금 조성으로 가정폭력, 피해여성 지원에도 힘썼으며, 여성운동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선생님 댁에 갔다가 책을 한번 보게됐다. 페이지별로 장학생 이름과 학생에게 언제 무슨 돈을 줬는지 기록한 가계부였다. 수재도 많았지만, 여상,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는 분들, ‘여상이라도 다니고 싶었던’ 분들도 많았다. 선생님은 직접 우체국으로 가서 우편환으로 하나하나 송금하셨다. 그때 여성들은 집에서 초,중학교도 안보내던 때인데, 학생들을 지원했을 때 선생님 마음이 어땠을까. 그 학생들이 대학에 가고 싶어도 못가고 공장에 가서 일해야했을 때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했다.” 김현지 PD의 말이다.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백 명의 김장하, 천 명의 김장하가 만들어갈 더 나은 사회를 바라며

김장하 선생은 지난해 12월 평생 해오던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했다. 남은 기금 34억 가까이를 경상국립대에 기증했다. 1963년부터 60여 년 운영해온 남성당한약방도 지난 5월말 문을 닫았다. 

“우리가 이런 ‘어른’을 멋있어하지만, 사실 선생님이 하셨던 일들은 다 사회가 책임졌어야 하는 문제인데, 사회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까 선생님이 메꿔주신 부분이다. 환경도 여성도 교육도. 우리가 한사람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워놓고 그냥 ‘존경’이라는 말로 퉁 치는 건 아닐까. 아주 어려서부터 ‘어른’으로 너무 외로웠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성당한약방이 문닫는 날 가족분들이 다들 모여서 같이 셔터를 내리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그 대가족이 너무 화기애애했다. 이 사람이 그렇게 힘들게 사셨지만, 이렇게 마땅한 보상을 받고 있구나. 감사하고, 괜히 많이 울컥했다.” 김현지 PD의 말이다.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 MBC경남 '어른 김장하'. 사진=MBC 경남 제공.

2부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는 12월31일 오전 9시, 새해 1월1일 오전 8시30분에 나눠 MBC경남에서 방송된다. 유튜브 채널 ‘엠키타카’를 통해서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 책을 쓸 거라는 말은 취재가 거의 끝나고 집필이 들어갈 무렵인 올해 10월말 선생에게 전했다. 대답은 같았다. “칭찬하지도 말고, 욕하지도 말고” 선생은 김주완 기자에게 이렇게만 말했다.  

김주완 기자는 “책이나 다큐를 본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선생님을 닮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걸 통해서 백 명의 김장하, 천 명의 김장하가 생겨난다면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질 수 있지않을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김현지 PD도 “선생님은 함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나누고, 평범한 걸 사랑하고. 자기 자리에서 60년 넘게 최선을 다하신 분”이라며 “이 사람이 돈을 얼마 썼다, 얼마나 다양한 분야를 지원했다보다는 그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 이 알고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느끼게 되는 것이 연출자로서의 목표”라고 말했다.

(2023년 1월31일 오후 6시58분 기사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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