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소송을 걸려고 한 게 아니라 ‘숨구멍’을 요청했습니다.”

지난 9월 KBS가 230여명의 방송제작 노동자들을 불법파견했다는 판결이 나왔다. 전·현직 KBS미디어텍 노동자들이 KBS와 KBS미디어텍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이었다. 

KBS미디어텍은 KBS가 2009년 기간제법 시행에 대응하려 만든 자회사다. 기간제 근로자를 2년 이상 고용하면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라는 법이 생기자, 자회사를 만들어 본사의 방송제작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전시켰다. 이후 KBS미디어텍 노동자들은 KBS에서 KBS 직원의 지시를 받고 KBS 직원들과 섞여 일해왔다. KBS 본사와 지역국의 보도, 드라마, 정규프로그램, 스포츠중계 그래픽과 영상,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방송제작 업무를 해왔다. 그러나 고용 형태는 “도급계약”, 본사 직원의 ‘아래’ 위치에 놓여 임금은 40~50% 수준이다. 

그간 KBS는 방송제작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라는 판단을 외면해왔다. 2019년 ‘특수영상·사운드디자인 노동자 58명을 직접고용’하라는 고용노동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해 9월 서울남부지방법원이 KBS의 불법파견을 인정하며 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고, 파견기간 받았어야 할 임금 240억 원을 배상하라고 했지만, KBS는 항소했다. 

▲조화윤 언론노조 KBS미디어텍지부장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KBS미디어텍지부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조화윤 언론노조 KBS미디어텍지부장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KBS미디어텍지부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2004년 KBS에 입사한 조화윤 KBS미디어텍지부장도 2009년부터 미디어텍 소속이 됐다. 조 지부장은 “(노조는 회사에) 숨구멍을 요청했었다”며 “수없이 대화를 요청해왔지만 KBS가 받아들이지 않아 소송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인정 범위를 넓혀온” 판결 의미를 짚으면서도 아쉬움도 남는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KBS미디어텍지부 사무실에서 조화윤 지부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래는 일문일답.

- 어떻게 소송이 시작됐나. 
“(처음부터) 소송을 걸 생각이 없었다. 노동부를 찾아갈 생각도 안 했다. 처음엔 ‘숨구멍을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임금과 처우 차별이, 같은 업무를 하는 본사 직원과 너무 많이 (차이가) 난다고 호소했다. KBS에서 넘어온 고연차 미디어텍 직원과 미디어텍 신입으로 입사한 노동자와의 격차도 컸다. 그러나 KBS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9년 고용노동부의 KBS미디어텍 근로감독 결과가 나오자 KBS미디어텍지부가 KBS에 직접고용을 요구한 전단지.
▲2019년 고용노동부의 KBS미디어텍 근로감독 결과가 나오자 KBS미디어텍지부가 KBS에 직접고용을 요구한 전단지.

- 2019년 노동부 근로감독 신청을 하고,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째다. 사측과 대화는 없었나.
“모든 과정에서 수없이 소통을 시도했다. 우리가 (불법파견 판정으로 직고용돼) 들어간다면 같이 일해야 할 텐데, 잘 마무리하자고 얘기해왔다. 노동부가 2019년 189명에 대해선 직접고용을 시정명령하고 58명에 대해서도 직접고용을 권고했다. 미디어텍 노동자들은 전원 직고용을 요구했는데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는 시정명령 대상인 189명만 직고용했고 직고용마저 ‘특정직’이라는 직군을 신설해 차별적 임금 테이블을 적용했다. 그래서 조합원 투표를 통해 소송을 결정했다.”

KBS 미디어텍에는 상당히 다양한 직군의 노동자들이 소속됐다. 1심 재판부는 뉴스진행, 뉴스영상편집, 스포츠중계, SNG밴(이동위성중계차량) 운용, 오디오녹음, 보도CG, NLE영상, 편성CG, 특수영상제작 등 직군의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운드디자인 담당 5명의 경우 전문성·기술성·재량여지를 이유로 파견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조 지부장은 사운드 관련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도 실질적인 노동환경은 불법파견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KBS미디어텍지부 측이 법정에 제출한 불법파견 증거 사진의 일부. 2014년 러시아 소치올림픽 당시 현지 출장지와 드라마 촬영지에서 KBS와 미디어텍 노동자가 혼재 근무하는 현장. KBS미디어텍지부 제공
▲KBS미디어텍지부 측이 법정에 제출한 불법파견 증거 사진의 일부. 2014년 러시아 소치올림픽 당시 현지 출장지와 드라마 촬영지에서 KBS와 미디어텍 노동자가 혼재 근무하는 현장. KBS미디어텍지부 제공

- 재판부가 노동자들의 근무 과정이나 결과물로는 본사와 미디어텍 노동자 구분이 어렵다고 했다.
“미디어텍 노동자들은 본사 직원들이 바로 업무를 지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미디어텍 소속 ‘KBS월드 OAP(홍보영상제작)’ 팀은 ‘KBS월드’ 사무실 한 가운데 있다. 뉴스PD는 KBS보도국에 있었다. OAP팀은 본사의 OAP팀이 이사할 때마다 따라 이사했다. 드라마 담당은 KBS 본사 드라마국에 있다.”

- 조 지부장은 어떤 일을 했나.
“스포츠중계와 특수영상 업무를 했다. 본사 직원과 같은 공간에서 ‘혼재 근무’(원·하청 근로자가 한 곳에서 섞여 일한다는 의미)했다. 휴가조차 본사 직원에게 상의하거나 승인을 받고 가야 했다. 본사 이름의 ‘ID카드’(통합 신분증)를 받았다. 본사 직원과 함께 크레딧에 올랐다. 이게 아니면 무엇이 불법파견일지 묻고 싶다. 미디어텍과 본사가 만든 결과물을 봐도 누가 만든 자료인지 모를 정도다. 재판부가 불법파견 인정 대상에서 제외한 사운드팀도 마찬가지다.”

▲KBS 본사 직원과 미디어텍 직원들이 제작한 그래픽 업무의 동종유사성을 입증하는 증거자료. 모두 KBS에서 방영된 방송으로, (왼쪽)KBS가 제작한 그래픽과 미디어텍이 제작한 그래픽에 차이를 찾기 어렵다. 미디어텍지부 제공
▲KBS 본사 직원과 미디어텍 직원들이 제작한 그래픽 업무의 동종유사성을 입증하는 증거자료. 모두 KBS에서 방영된 방송으로, (왼쪽)KBS가 제작한 그래픽과 미디어텍이 제작한 그래픽에 차이를 찾기 어렵다. 미디어텍지부 제공

- 사운드팀도 불법파견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가 뭔가.
“사운드실이 엄청 크다. 본사 CP부터 PD까지 다 사운드실에 와서 작업물 보면서 ‘이거 돌려봐, 오케이, 이거 빼’ 직접적으로 관리, 작업, 지시를 다 한다. 나중에 KBS가 법정에서 사운드실에 업무를 지시한 게 아니라 쉬러 간 거였다고 하더라. 만약 정말 외주 도급이었다면, 이런 자잘한 지시나 수정 사항마다 금액이 올라야 한다. 위탁이란 이유로 더 ‘빼먹기’가 가능한 구조다. (재판 과정에서) 사운드 스튜디오 앞에 ‘마크’(M스튜디오)가 붙어 있고, 외주 수익사업을 했기 때문에 불법 파견이 아니라고 했다. 수익률을 합의해서 작업을 했던 내용 위주로 (재판부에) 제출을 하다 보니 ‘수익 사업 위주로만 했다’는 판단이 된 것 같다. (불법파견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항소심이 뒤집힐)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불법파견이 업무 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있을까.
“누가 봐도 혼재 근무인데 공식 인정이 되지 않으니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미디어텍 설립 후에도 KBS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와 똑같은 구조로 일했다. 모든 관리를 본사로부터 받았고 직원 관계가 ‘위-아래’로 나뉘었다. 본사 직원이 미디어텍 직원을 통제하려 하면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다. 오전과 오후에 함께 일하는 본사 팀장이 다르니, 오전 담당자가 바라는 대로 업무를 해놓으면, 오후 담당자가 자기 스타일로 고치는 일이 반복되는 식이다. (KBS 지휘·감독이) 공식으로 인정되지 않으니 애로사항을 제기할 수 없다. 저만 해도 소송 이전부터 분기마다 고충처리기구에 ‘혼재근무가 힘들다’고 어필을 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7년 말 KBS 파업 당시 KBS 노동자가 KBS미디어텍 노동자에게 파업로고를 3D파일로 만들어달라고 지시해 수행하는 내용. KBS미디어텍지부 측이 법정에 제출한 KBS 직원의 지시 증거 사진의 일부. KBS미디어텍지부 제공
▲2017년 말 KBS 파업 당시 KBS 노동자가 KBS미디어텍 노동자에게 파업로고를 3D파일로 만들어달라고 지시하는 내용. KBS미디어텍지부 측이 법정에 제출한 KBS 직원의 지시 증거 사진의 일부. KBS미디어텍지부 제공

- 불법파견 증거를 지우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들었다. 
“2019년 노동부 근로감독 때부터 있었다. 본사와 미디어텍 직원들은 기존엔 사무실에 칸막이 없이 ‘형 동생’ 하면서 일했다. 노동부가 이걸 불법 요소로 보자 KBS가 갑자기 미디어텍 간판 달고, 칸막이 해주고, 공문을 보냈다. 미디어텍 소속이던 뉴스PD 직군의 경우 본사 기자들이 일하는 사무실 가운데에서 일했다. 그런데 근로감독 이후 본사 직원이 직접 불러 지시하던 내용을 공중에 외쳤다고 한다. ‘이 업무가 있는데 담당자는 처리하세요’라고.”

- 1심 재판부는 소송을 제기한 대다수 직군을 직고용 대상으로 보면서도, 이들과 본사 공채 직원간 ‘직급’이 같을 수 없다고 했다. 본사와 미디어텍 근로자들 채용 방식과 절차에 차이가 있고, 미디어텍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과정에서 설립’됐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손해배상액이 노동자들이 청구한 490억 원의 절반 수준으로 깎인 이유다.
“재판부는 ‘KBS와 미디어텍 채용방식과 절차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실제 채용 방식은 유사했다. 모집공고 방식이 유사했고, 미디어텍 설립 초반에는 KBS 부장이 면접관으로 오기도 했다. 재판부는 ‘KBS 직원과 동종·유사업무라 볼 수 없다’며 직급을 낮게 판단했는데 모순이다. KBS와 섞여 유사한 업무를 했고 구분을 하기 어렵기에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한 것 아닌가.”

▲조화윤 언론노조 KBS미디어텍지부장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KBS미디어텍지부 사무실에서 미디어텍 노동자들이 제작한 KBS 영상을 재생해 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조화윤 언론노조 KBS미디어텍지부장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KBS미디어텍지부 사무실에서 미디어텍 노동자들이 제작한 KBS 영상을 재생해 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사측과 노동자들 모두 항소를 했으니 법정싸움도 길어질 것 같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달라.
“지면 보도로는 많이 나왔지만 방송사들은 판결 소식을 보도하지 않더라. 방송사들은 불법파견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수십년간 만연해온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주요 방송사들이 전향적이고 책임 있는 자세로 문제 해결에 나서길 촉구한다. 특히 KBS는 ‘공영방송이 이래도 되느냐’고들 이야기한다. 비정규직과 파견 문제에 대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수십차례 제작·방송하면서도 뒤로는 수백 명의 근로자를 파견받아 부당이득을 취해왔다. 하루빨리 KBS는 이러한 모순되고 위선적인 태도를 버리고 진정한 공적책임을 수행하는 공영방송사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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