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인들이 강제해직된지 24년 째를 맞고 있으나 그동안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들은 20여년 동안 수차례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원상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해직 언론인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재조명했다.

   해직 언론인들의 명예회복 노력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가 내란목적으로 80년 8월 933명의 언론인을 강제해직시키고, 12월 언론통폐합을 통해 400여명을 해직시키는 등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당한 언론인은 모두 1300여명에 달했다.

언론자유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해직 이후 1984년 3월 ‘80년 해직언론인 협의회’(해언협)를 결성해 명예회복과 원상회복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언협은 89년 2월 동아투위·조선투위와 언노련, 기자협회 등과 함께 ‘전국 해직언론인 원상회복 쟁취협의회’(원상협)를 결성, 전체 해직언론인의 명예회복과 원상회복 운동의 범위를 확대했다.

해언협은 명예회복을 위해 80년대 말부터 꾸준히 입법·사법투쟁을 병행했다. 해언협은 89년 10월11일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과 관련해 허문도, 이상재, 이원홍, 이진희, 권정달 등 5인을 해직언론인 526명의 이름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지만, 피고들은 90년 1월5일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됐다.

89년 10월23일 야3당과 무소속의원 165명은 80년 해직언론인의 보상 및 복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3당합당을 거치면서 국회통과가 무산됐다.

이에 따라 해언협은 지난 92년 10월부터 93년 4월까지 기자협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과 함께 해직언론인 원상회복을 위해 광범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현직언론인 5182명의 서명을 받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치권도 93년 4월26일 75·80년 해직언론인 복직 및 보상기준 등을 명문화한 특별법제정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와 함께 부당한 해고였음을 증명하기 위한 개인 차원의 노력도 있었다. 특히 90년 1월24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이 80년 해직된 홍윤호 전 KBS 제2사회부장이 KBS 사장을 상대로 낸 해고처분 무효소송에서 ‘당시 해고가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개별적인 복직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앞서 신군부의 권력 찬탈과정에서 해직됐던 1300여명 중, 89년 8월까지 언론사에 재취업하거나 다른 언론사에 취업한 언론인은 366명이었다.

▷언론청문회, 전두환 ·노태우 기소= 신군부의 언론인 강제해직 및 통폐합에 대한 진상은 지난 88년 언론관계 청문회를 통해 일부 윤곽이 드러났다. 지난 88년 11월 21∼22일, 12월 12∼13일 두차례에 걸쳐 진행된 언론청문회에서는 언론인해직과 언론통폐합 조치가 전두환 국보위 상암위원장의 총지휘 아래 권정달·허문도·이상재 씨에 의해 주도됐고, 언론통제도 전씨의 관여 아래 허문도·이진희·이원홍씨에 의해 주도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298명이던 해직대상자 수가 933명이 불어난 원인, 언론사 사주들이 어떻게 협력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했다.

언론 탄압의 진상은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전두환·노태우 등에 대한 수사와 판결을 통해 보다 자세히 드러났다. 96년 1월말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는 전두환·노태우 등을 기소하면서 발표한 공소장에서 “전씨가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회를 통해 ‘언론계자체 정화계획’을 수립케 하고 이를 이광표 문공부장관에게 전달해 언론사의 자율형식을 취하도록 해서 933명의 언론인이 해직되도록 했다”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언론통폐합과 관련 “보안사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언론 건전육성종합방안 보고서’를 작성하자 허문도로부터 언론통폐합의 필요성을 수차례 설명받고, ‘언론창달계획’의 보고서를 최종 작성하게 했다. 전씨는 80년 11월12일 한용원 정보처장 등에게 언론사주들을 불러 신속하게 각서를 받고 언론통폐합을 실행했다”고 밝혔다.

   20여년 간 노력했지만 포기상태

해직언론인들은 전·노씨의 수사와 재판으로 80년 언론인 해직의 진상에 대해 윤곽은 드러났지만 △당시 이광표 문공부 장관이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등이 왜 기소대상에서 제외됐는지 △언론대책반이 작성했다는 해직대상 언론인이 누구인지 △해직자 수가 어떻게 늘어났는지 △해직과정에서 언론사 사주들이 얼마나 개입됐는지, 이들이 피해자였는지 적극적인 내란행위 동조자인지 등에 대해서는 재판과정에서조차 전혀 규명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따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는 1996년 2월16일 서울지검에 80년 언론인 대량해직과 통폐합에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난 허문도·이상재·권정달·이광표·이수정·허만일 씨 등 6명을 고소했다. 서울지검은 그러나 97년 3월11월 이들에 대해 기소유예 및 무혐의처리했다. 해언협은 같은 해 3월에는 공보처를 상대로 행정심판청구를 청구했으나 각하됐고, 7월엔 국가배상을 청구했으나 시효소멸이라는 사유로 기각됐다. 해언협 고승우 대표는 “재판과정에서도 드러난 언론학살의 책임과 관련, 국가가 아직도 사과는커녕 진상규명의 노력조차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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