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대한상공회의소(회장 최태원) 보도자료를 인용해 “국민 10명 중 7명이 노란봉투법에 부정적”이라는 설문조사 보도를 쏟아냈지만, 해당 조사는 노조에 부정적 이미지를 전제한 질문으로 구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가 노동자의 쟁의행위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가압류신청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에 부정 인식을 심는 이른바 ‘여론몰이’ 조사 결과를 내놓고 언론이 받아쓰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종합일간지와 통신사, 방송사, 경제지 등 30여개 매체는 지난 24일 “국민 10명 중 7명이 노란봉투법에 부정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노란봉투법에 대해 국민의 70%가 ‘부당’하다고 여기며 현행 노동조합법이 노조 파업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노사관계를 바라보는 인식에 ‘부정적 이미지가 크다’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한국일보·동아일보 등 일간지와 연합뉴스·뉴시스·뉴스1 등 통신사, 경제지와 방송사를 막론하고 보도가 쏟아졌다. 

이는 대한상의가 24일 내놓은 자체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한 ‘받아쓰기’ 기사들이다. 대한상의는 보도자료에서 “대한상의가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7일까지 국민 1023명을 대상으로 불법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청구를 제한하는 입법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국민 51.8%가 ‘부당하다’, 19.5%가 ‘매우 부당하다’고 답했다”고 했는데, 매체들은 이를 인용했다.

▲24일 대한상의 여론조사를 인용한 노란봉투법 비판 기사들. 네이버(왼쪽), 다음 포털 뉴스페이지 검색결과
▲24일 대한상의 여론조사를 인용한 노란봉투법 비판 기사들. 네이버(왼쪽), 다음(오른쪽) 포털 뉴스페이지 검색결과

대한상의 관계자가 “노조의 불법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청구를 제한하는 특혜를 부여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재산권과 평등권에 위배된다”고 보도자료에서 밝힌 의견도 그대로 기사화됐다.

그러나 대한상의가 개별 매체 요청에 별도로 내놓은 질문지를 보면, 도입부부터 노조를 부정적으로 규정하는 단어를 제시했다. 설문 1번 문항은 ‘우리나라 노사관계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물은 뒤 24개 단어를 나열했다. 첫줄에 △불법적 △사업장 점거 △폭력적 △떼법·떼쓰기 △손해·재산권침해 △투쟁·대립적 등 단어를 담았다. 재계가 노동자를 묘사할 때 주로 쓰는 부정적인 단어들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7일까지 국민 102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고 밝힌 설문 문항. 대한상공회의소 제공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21일부터 이달 7일까지 국민 102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고 밝힌 설문 문항. 대한상공회의소 제공

이후에도 노동자에 불리하게 편향된 질문이 이어졌다. 2번 문항은 “현행 노조법이 노조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데 어떻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이에 앞서 “현행 노조법은 정당한 파업에 대한 △노조의 민형사상 책임면제 △파업으로 중단된 업무에 기업의 대체인력 투입 금지 △노조 파업시 사업장 일부점거 허용 등을 보장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 문항은 “불법 쟁의행위로 발생한 재산상 피해에 손배를 금지·제한하는 입법을 국회에서 추진 중”이라며 “불법쟁의행위에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대한상의는 응답자들이 각 질문에 ‘69.1%가 단체행동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으며 71.3%가 (노란봉투법이) 부당하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 최범규 수석부지회장이 24일 국회 앞에서 기업의 노조활동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가압류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통과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노동현장 손배사업장 당사자 대응모임 제공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 최범규 수석부지회장이 24일 국회 앞에서 기업의 노조활동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가압류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통과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노동현장 손배사업장 당사자 대응모임 제공

여론조사 전문가와 노동계는 여론조사 문항 순서와 내용 설계부터 노조와 노란봉투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하도록 유도했다고 지적한다.

먼저 노란봉투법을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 청구를 제한하는 법’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사실 왜곡을 담고 있다는 비판이다.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는 “기업은 파업이 불법이라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는 사측의 ‘불법이라는 주장’만으로 손배 청구가 가능한 현 손배·가압류 제도의 문제를 지적해왔다. 노동자가 ‘합법’ 판결을 받아도 1심 선고까지 평균 2년 2개월, 최대 7년이 걸리면서 노동권을 제약받는 부당한 현실을 문제삼은 것”이라고 했다. 윤지선 활동가는 “이들 설문조사는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을 잡고 있다. 응답자들이 설문에 참여하는 순간 노란봉투법에 대해 ‘불법’이란 인상을 남기기 위함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24일 국회 정문 앞에서 열린 ‘노동현장 손배사업장 당사자 대응모임’의 고용노동부 손배 실태 발표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속노조 제공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24일 국회 정문 앞에서 열린 ‘노동현장 손배사업장 당사자 대응모임’의 고용노동부 손배 실태 발표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속노조 제공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문항 내용을 살핀 뒤 “특정 상황을 가정해 과도한 사전 정보를 주면 그 응답은 특정 이해당사자에 유리한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편향된 한쪽 방향의 응답을 유도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폭력’ ‘범죄’ 등은 단어 자체가 갖는 편향성이 커 정확하고 공정한 응답을 얻는 데 문제가 된다. 더구나 특정 방향의 인식을 갖게하는 설문을 앞쪽에 제시할 경우 이후 설문에도 그쪽으로 결과가 나온다. 이른바 ‘질문지 순서 효과’”라고 설명했다.

이 전문가는 “쟁점에 대해 이해당사자 한 쪽이 여론 지형에 영향을 주려는 여론조사, ‘사주 여론조사’의 성격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며 “사회적 쟁점 사안에 한 쪽의 이해당사자가 실시하는 조사는 편향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경우 언론은 보도에서 다른 사안보다 엄격하고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대한상의가) 직접 설계한 문항”이라고 밝힌 뒤 “△노조탄압 △사회공헌 등 노조활동의 목적도 열쇳말에 담아 중립적으로 조사하고자 했다. 설문 가운데 (먼저 본 단어보다) 나중에 본 것이 더 기억에 남지 않나. 가치판단을 넣지 않은 질문들”이라고 답했다. ‘불법파업’을 규정한 질문이라는 지적에는 “신문에 나온 ‘불법파업에 대한 손배 제한 법’이란 표현을 인용해 쓴 것 뿐이며 ‘파업만능주의’ 등 재계 입장을 문구에 넣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에선 파업에 불법 이미지를 덧씌운 설문을 진행하고, 언론이 이를 검증 없이 받아쓰면서 노란봉투법 반대에 힘을 싣는 행태가 거듭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노동조합의 불법행위에 대한 인식 △정부가 노동조합의 불법행위에 대처하는 것에 대한 인식 등을 문항으로 제시해 긍·부정 인식을 물었다. 이는 연합뉴스를 비롯한 13개 매체의 “국민 10명 중 9명이 노동조합의 불법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보도로 이어졌다.

▲9월20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여론조사의 문항 갈무리. 경총 제공
▲9월20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여론조사의 문항 갈무리. 경총 제공

쌍용자동차와 현대제철 비정규직 등 노동자들이 가입한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장석원 언론부장은 “이미 제목과 질문에 불법이라는 규정이 들어갔다면 그 답은 뻔하다고 본다”며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여론조사를 가장한 자본가 단체의 주장이 매체를 통해 검증 없이 반복적으로 기사화된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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