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는 ‘세계 문화다양성의 날’에 맞춰 문화다양성주간을 운영한다. 작년(2021년) 7회를 맞이한 이 행사 제목은 ‘취향존중, 취향저격’이었다. 문화다양성은 ‘취향’이 아니라 ‘권력’과 권력의 격차로 인한 ‘불평등’의 문제가 핵심이다. 취향이나 취향존중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 자체 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왜 모든 사람의 취향을 존중하지 못하고 있는가’ 또는 ‘왜 누군가는 “취향”이라는 것을 아예 가질 수 없는가’ 그리고 그것이 ‘권력’과 ‘불평등’의 문제라는 것이 중심이 돼야한다.

전통, 생활양식, 음식, 건축 등 ‘인간의 삶의 총체’라고 불리는 “문화”가 ‘누구의 것인가, 어떤 사람들만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그래서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문화다양성에 대한 논의와 정책의 핵심이어야 한다.

▲ 2021년 문화다양성 주간
▲ 2021년 문화다양성 주간

이 사회에는 인종, 민족,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질병, 외모, 나이, 지역, 가족의 형태, 종교, 소득/경제력, 고용의 형태, 학력/학벌과 같은 사회적 정체성마다 누군가를 ‘비정상’으로 만들고 그 결과 자신이 속한 그룹만이 ‘정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상성’을 획득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정상성은 그 정상성을 가지고 있는 그룹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특권을 형성하게 하고 억압받는 그룹인 억압그룹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차별, 억압, 폭력을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 합리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면 비장애인이 정상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차별, 억압,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지며 비장애인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차별의 대상이 되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 장애인에 대한 구조적인 억압을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결핍 때문이라고 보게 된다. 이를 비장애인중심주의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의 문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비장애인의 삶의 양식이 문화가 되고 비장애인만이 그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장애인에게는 “문화”라는 것이 없어지고 장애인은 문화를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남성중심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 시스젠더/이성애중심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동성애자 양성애자 범성애자 무성애자 등의 성소수자들, 선주민중심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 성인(비청소년)중심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어린이 청소년들 등의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문화”라는 것이 없어지고 문화를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노영순(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문화는 인간 삶의 총체적 양식이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의 기초이며,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에 대한 권리(right to culture)’ 보장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의 관점에서 국가의 최우선 책무로 인정하고 이의 실천적 대응으로서 문화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중요한 부분은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모든 인간이 돼야 하며 여기서 말하는 국민은 모든 국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 보장의 주체는 국가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문화에 대한 권리’를 모든 국민과 모든 인간에 대해 보장하고 있을까? 이런 사례를 살펴보자. 장애인이 극장과 같은 문화시설들뿐만 아니라 학교와 같은 기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인 공공기관에도 출입할 수 없고 평등한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면, 지하철과 버스같은 대중교통을 평등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없다면 장애인의 문화, 장애인에 의한 문화, 장애인을 위한 문화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국가가 모두를 위한 ‘문화에 대한 권리, 문화다양성’을 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 9월19일 오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전장연 관계자자 대형 화물 카트에 들어간 채 지하철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 9월19일 오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전장연 관계자자 대형 화물 카트에 들어간 채 지하철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여성과 남성의 인구비율은 50:50 혹은 여성이 조금 더 많기도 한데 정치, 경제, 언론 등 사회의 제도, 정책, 여론을 만들어 가는 분야들에서 여성의 비율이 여전히 비교도 안될 정도도 낮다면 여성의 삶을 대표하는 문화가 온전히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영화, 드라마, 음악, 문학 등의 문화사업 안에서도 여성 제작자, 여성 창작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다면(그런 상황이 남성중심적인 문화산업과 사회구조에 기인한다면) 여성에게 모두를 위한 ‘문화에 대한 권리, 문화다양성’을 보장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가 전철역과 같은 대중교통, 시청이나 구청과 같은 공공시설, 초중고와 같은 학교나 대학 그리고 일터 어디를 가더라도 성별이분법에 의한 화장실 밖에 없어 화장실 이용이 어려워 사회생활이 어렵다면 트랜스젠더의 문화, 트랜스젠더에 의한 문화, 트랜스젠더를 위한 문화라는 것이 가능할까? 트랜스젠더 뿐만 아니다. 장애인과 여성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화장실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화장실 사용이 어려운 사람들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 ‘젠더갈등’이 심각하다고 한다. 여성과 남성이 성별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다. 그렇게 느껴지게끔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 억압, 폭력을 가리기 위해서 ‘젠더갈등’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마치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힘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갈등’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와 교회의 갈등’,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갈등’ 모두 같은 의도가 있는 표현들이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차별을 지우고 오히려 그들을 주류사회와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문제)을 만드는 문제적인 존재들로 묘사하는 방식이다. 국가와 사회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억압, 폭력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모두의 문화적 권리(문화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유네스코(UNESCO)의 문화다양성선언(Universal Declaration on Cultural Diversity)과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 협약(Convention on the Protection and Promotion of the Diversity of Cultural Expression)’은 문화권을 인권의 핵심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모든 문화가 자신을 표현하고 알릴 수 있게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모든 이를 위한 문화다양성을 강조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권력’과 그 ‘권력의 격차’에 의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알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한 사회에서 ‘비정상적이다’, ‘열등하다’와 같이 인식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마음껏 표현하고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가 자신을 표현하고 알릴 수 있으려면 평등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함을 기반으로 안전해야 한다. 퀴어문화축제는 일 년에 단 하루 있는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서로를 확인하고자 광장에 나오는 성소수자들과 지지자들의 문화축제다. 그런 날에도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생각해 보면 ‘모든 문화가 자신을 표현하고 알릴 수 있게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선언을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국내에서도 2013년 12월에 제정된 「문화기본법」의 제4조를 보면 문화권을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정치적 견해,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로 정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정체성 그룹과 상관없이 평등한 사회에 살 수 있어야 문화적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모두의 문화권이 보장되고 문화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이 정체성에 의한 차별을 경험하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는 이를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inclusive society)”라고 부르고 있다.

다양성과 관련한 논의 가운데 전국적으로 잘못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가 하나 있다. 바로 “포용”이다. 포용은 엄연한 권력관계 내에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을 해주는(해줄 수 있는) 주체(더 우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그룹)가 있고 포용적인 조치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단어다. 한국 사회가 "포용"으로 오역하고 있는 "inclusion"이라는 단어는 '포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포함은 한 공동체 속에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원으로서 평등한 주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포함은 ‘누가 누구를 포용해 준다’는 것처럼 개인의 선한 의지에 기대야 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 간의 권력관계에 대한 명확한 문제의식과 사회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관점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며 실천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한국 사회가 포함이 아닌 포용을 사용하게 된 것인지 혹은 어떤 연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치인, 학자, 연구자, 단체, 기업 등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그 어느 누구도 ‘inclusion’을 ‘포함’으로 정확히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다. 한국다양성연구소를 제외하곤 전혀(혹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전히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 ‘윤리적으로 만 옳은 게 아니라 기업과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니 다름을 포용하고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정도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럭저럭 맞는 이야기 같지만 ‘권력’ 그리고 ‘불평등’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빼놓고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성과 포함’은 구조적인 차별, 억압, 폭력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 어느 누구도 배제와 소외를 경험하지 않는 모두에게 평등하고 안전한 공동체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문화다양성은 그런 사회에서 보장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가 평등하게 포함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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