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법적 다툼에 기댄 싸움을 넘어 직접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운동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개별 노동자들이 얻어낸 법적 성과를 두고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방송사를 상대로 교섭 요구나 대응에 나서지 않는 현실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류호정·이은주 정의당 의원과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 노동·법률단체들은 지난달 30일 국회의원회관 3간담회실에서 ‘방송 비정규직 운동 방향과 과제 도출을 위한 토론회 및 증언대회’를 열었다.

안명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이날 방송 비정규직 투쟁 상황을 가리켜 “법에서는 이겼지만 현실에서는 진 상태”라며 “정부와 법원 판단에 기댄 투쟁이 유효하지 않다”고 요약했다.

‘프리랜서’ PD, 디자이너, MD, 작가 등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개별로 나서 소송과 노동위원회 등에서 노동자성을 속속 인정 받고 있다. 그러나 방송사들의 불복과 배제 전략은 오히려 ‘진화’ 중이라는 평가다. 지상파 방송3사는 ‘직원’ 외로 처우가 열악한 별도 직군을 신설해 작가를 귀속시켰다.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들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가 계약연장이 거부 됐다. 근로감독 결과 노동자성을 인정 받은 작가는 외려 방송사들이 ‘기간제’로 돌리며 계약이 끝난 뒤 일자리를 잃었다.

▲류호정·이은주 정의당 의원과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 노동·법률단체들은 지난달 30일 국회의원회관 3간담회실에서 ‘방송 비정규직 운동 방향과 과제 도출을 위한 토론회 및 증언대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류호정·이은주 정의당 의원과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 노동·법률단체들은 지난달 30일 국회의원회관 3간담회실에서 ‘방송 비정규직 운동 방향과 과제 도출을 위한 토론회 및 증언대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노조가 중심이 돼 싸워나가야 하는 시점”

활동가와 당사자들은 사측을 움직이는 핵심 요소인 사용자를 상대로 한 싸움이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안명희 활동가는 “법적 노동자성도 인정받고, 정부도 이들이 노동자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것이 왜곡돼 적용되고 있으며 문제는 방송사에 있다”고 했다. 그는 “영화노조와 방송연기자노조도 싸움의 중심에 ‘교섭’이 있었다고 했다. 근로자성 인정 투쟁과 첫 단추가 달랐다. 노조가 중심이 돼 싸워나가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방송 비정규직) 법률 대응을 하며 느낀 방송사의 태도는 ‘(동등한 노동자로 인정하는)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 노무사는 “KBS의 경우 3~4년 전에 (노동자) 전수조사를 이미 했고 절반에 가까운 인력이 비정규직이라는 결론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말로써 교섭으로 이어질 수는 없고 교섭이든 제대로 된 실태조사이든 촉구하는 집단 대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김유경 돌꽃 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사진=김예리 기자
▲김유경 돌꽃 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 사진=김예리 기자

방청석에 앉았던 홍태화 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도 사용자를 상대로 한 교섭 요구를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산업노조는 2005년에 노조를 만든 뒤 2006년에 교섭을 첫 시작했고, 2007년에 단협을 체결했다. 홍 국장은 “아무것도 없던 영화 업계에 가이드라인 마련까지 1년 반이 걸렸다”며 “나오란다고 사용자들이 교섭에 나오지 않는다. 법을 하나도 안 지키는데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 아닌가. 삭발도 하고 갖은 투쟁을 했다”고 했다. 

사용자를 상대로 한 전국언론노동조합의 역할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홍 국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좋은 선례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파급 효과가 왜 없을까. 둥지를 튼 언론 노조가 뭘 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며 “(영화노조도) 처음 노조 둥지를 틀 때 언론노조를 찾아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왜? 비정규직이라서. 그래서 공공운수노조에 둥지를 틀었다”고 밝혔다.

▲홍태화 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 사진=김예리 기자
▲홍태화 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 사진=김예리 기자

현장 증언에 나선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법적 다툼을 하거나 승소 상황을 전하면서 언론노조 또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접촉했던 경험을 언급했다. A 방송사 그래픽 디자이너 B씨는 “회사에서 호봉직과 연봉직 간의 소송 과정에서 프리랜서들이 가장 먼저 내쳐졌다. 사측은 소송 리스크를 줄이려 업무 스케쥴을 바꾸고 자리를 따로 배분하는 등 (프리랜서는)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아졌다. 사측은 ‘너희도 1~2년 뒤 (정규직) 전환된다’고 했지만 실질적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B씨는 “이에 (언론노조 소속) 노동조합에 호소했지만 ‘노동자가 아니라 보호해줄 수 없다’는 답을 받았다. 이를 보고 10년지기 선배들도 허무함을 느껴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며 “이제 승소해 근로자 지위를 얻었지만, 회사는 이젠 근무 이력을 인정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춘천MBC와 부당해고를 다투는 김남헌 PD는 “회사는 신분이 프리랜서였던 제게 방송종료를 명목으로 카카오톡 해고 통지를 했다”며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분들, 저와 일한 동료들이 나중에는 돌아서서 불리한 증언을 했다. 사내에선 모든 라인이 끊여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다수 활동가들이 이날 언론노조의 입장을 묻자 백재웅 전략조직국장은 “산별 노조나 정규직 노조라고 하면 1차적으로 교섭을 뚫으려면 당사자를 주체로 세우면서 뚫어줘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 당사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저희들이 주체 형성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미지 언론노조 비정규직 특임부위원장은 “방송비정규직과 시민사회 연대체 ‘미디어친구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고, 당사자가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바다. 언론노조가 함께 여러 차례 논의하려 했던 상황”이라며 “당사자의 뜻과 모아내는 힘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4년 전만 해도 증언대회에 나설 수 있는 분이 없어 토론으로 갈음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달라졌다. 6분이나 1시간에 걸쳐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사회 연대투쟁의 분명한 성과”라고 했다. 김 노무사는 “여전히 흩어져 있고 너무나 불안한 고용관계에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드러내기 어려운 게 맞지만 4년 전과는 다른 상황이 됐다. 여기서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작게 시작하더라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은 됐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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