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주최로 매년 열리는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EIDF)에서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주제로 하는 다큐멘터리 ‘금정굴 이야기’(감독 전승일)를 공식 상영작으로 선정했으나, EBS가 ‘방송불가’ 판정을 해, 문화계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제19회 EIDF는 지난 22일부터 28일까지 개최하는 다큐멘터리 행사로, 올해 63편의 상·방영작을 공개했다. 선정된 작품들은 EBS1TV에서 특별편성을 통해 작품들을 방영한다. 

앞서 EIDF는 5월 말 전승일 감독의 ‘금정굴 이야기’를 영화제 공식 상영작으로 선정했고, 오는 26일 영화관에서 상영과 함께 EBS1TV에서도 방영 예정이었다. ‘금정굴 이야기’는 1950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주제로 하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금정굴 이야기’는 EIDF에서는 상영되지만 TV를 통해서는 방영되지 못한다. EBS 측은 방송을 5일 앞둔 지난 23일 EBS심의위원회를 통해 ‘금정굴 이야기’에 대한 ‘방송불가’ 결정을 했다.

▲전승일 감독의 '금정굴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출처=EIDF 홈페이지. 
▲전승일 감독의 '금정굴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출처=EIDF 홈페이지. 

EBS “방송심의 조항에 부합하지 않아…영화 상영은 정상적으로”

EBS는 24일 공식입장을 통해 “28일 방송 예정이었던 ‘금정굴 이야기’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과 제14조(객관성) 조항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 대체 편성한다”고 밝혔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와 제14조는 “방송은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며,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으로 방송하여 시청자를 혼동케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EBS 측은 “방송 프로그램은 충분한 상황 및 시대적 맥락을 설명해야 하나, 방송 심의 과정에서 해당 작품은 18분 길이의 단편 작품으로 압축과 은유를 통해 상황과 맥락을 표현하다 보니, 객관적 자료 제시나 데이터에 대한 출처 표시 등이 부족한 점으로 인해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불충분한 점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방송불가 이유를 밝혔다. 

이어 “해당 작품은 애니메이션, 콜라주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사회공동체적 트라우마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그 작품적 가치는 존중되며, EIDF 극장 상영을 통해 시청자를 만나볼 수 있다”고 밝혔다. EIDF 관계자는 25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금정굴 이야기’의 영화관 상영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며 “‘방송불가’ 판정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현재 대책회의를 통해 정리 중”이라고 했다. 

▲제19회 EIDF 포스터. 사진출처=EIDF 홈페이지.
▲제19회 EIDF 포스터. 사진출처=EIDF 홈페이지.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 철회” 연대 서명 퍼져…수백명 서명

EBS심의위원회의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 결정이 나오자 23일 전승일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금정굴 이야기’ 극장 상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방송은 심의위에서 ‘방송 불가’됐다”고 밝혔다.

24일 전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EBS방송심의위원회는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 결정을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공유했다. 이 성명서에는 “EBS 심의위원회가 ‘방송불가’ 결정을 한 핵심적인 이유는 영화 전반부의 ‘한국의 군대와 경찰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을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학살했으며, 미군은 이를 묵인·방조했다’라는 자막이 있는 장면 때문이며, 심의위원회는 이 부분이 ‘사실’인지 여러 차례 영화제 코디네이터에게 질문을 했다고 한다”고 써있다.

해당 성명은 “이승만 정부 시기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이미 널리 밝혀진 역사적인 ‘팩트’”라 밝히며 △EBS 심의위원회가 ‘금정굴 이야기’의 ‘방송불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문서로 밝히고 △이를 영화제 조직위와 감독에게 공개할 것 △EBS 심의위원회는 ‘금정굴 이야기’의 ‘방송불가’ 결정을 즉각 철회하고 △방송 일정을 다시 잡을 것을 요구했다.

▲전승일 감독의 '금정굴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출처=EIDF 홈페이지. 
▲전승일 감독의 '금정굴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출처=EIDF 홈페이지. 

이 성명서에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금정굴유족회, 한국영화감독조합 등을 포함해 역사 시민단체, 문화 시민단체, 문화인 등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해당 서명은 구글 링크[링크]를 통해 연대서명이 진행 중이며 문화계 인사뿐 아니라 학생, 언론인, 시민 등 수백명의 개인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금정굴 이야기’의 전승일 감독은 이 장면을 구성할 때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신기철 지음, 자리출판사), ‘국민은 적이 아니다’(신기철 지음, 헤르츠나인),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신기철 지음, 인권평화연구소), ‘전쟁의 그늘’(인권평화연구소),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신기철 지음, 인권평화연구소), ‘골령골의 기억전쟁’(박만순 지음, 고두미), ‘전쟁 속의 또 다른 전쟁’(서중석 외 지음, 도서출판선인), ‘한국전쟁과 집단학살’(김기진 지음, 푸른역사),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김기진 지음, 역사비평사) 등 시중에 출간되어 있는 서적과, 위키백과 ‘보도연맹사건’ 내용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한편 ‘금정굴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사건은 지난 2007년 국가기관으로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도 조사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금정굴 사건이 경찰에 의한 불법적인 집단학살 사건이었으며,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으므로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내용을 하는 진실규명 결정을 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양금정굴 사건'에 대한 보고서 첫페이지. 사진출처=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 
▲진실화해위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양금정굴 사건'에 대한 보고서 첫페이지. 사진출처=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홈페이지. 

진실화해위가 2008년 8월27일 공개한 ‘고양 금정굴 사건’ 보고서를 살펴보면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의 고양지역 주민들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9일부터 10월31일 사이에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고양시 소재 금정굴에서 집단총살 당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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