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한국교육방송공사)와 ‘EBS 수능특강’ 집필진들이 교재를 만들면서 타인의 저작물을 무단으로 인용해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저작물을 무단으로 인용 당한 피해자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역사교사 A씨로 해외 사료를 직접 번역해 수업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7일 EBS와 집필진들이 사료번역물 46개 사용에 대해 저작권자인 A씨의 사전 허락을 받지 못했고 그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다며 A씨에게 약 58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또한 EBSi 홈페이지에 무단전재한 사실과 무단전재한 부분에 대해 공지하라고 판결했다. 

판결문과 미디어오늘 취재를 종합하면, A씨는 세계사 교과서에 사료가 거의 실리지 않아서 각 시대별 대표적 문헌·연설·조약·선언문 등의 사료를 직접 번역(영어·일어 등)해 수업자료로 활용해오다 지난 2000년 4월 책으로 펴냈다. A씨의 교재는 출간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학습자료로 인용됐고, 수능시험이나 모의고사 출제문항 지문으로도 활용됐다. 

그러다가 A씨는 자신의 동의 없이 EBS가 2010년 수능특강 교재에 자신의 번역물을 무단전재해 온 사실을 알게 돼 지난 2019년 12월 EBS와 집필진 5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이들에게 약 1800만원을 청구했다. 

구체적으로 저작재산권으로서 복제권 침해, 저작인격권으로서 성명표시권과 동일성유지권 침해를 주장했다. 복제권은 저작물을 복제할 권리를 말하고 성명표시권은 저작물에 저작자 이름을 표시할 권리(저작자 성명을 임의로 삭제하지 못함),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의 내용과 형식 등을 동일하게 유지할 권리를 말한다. 

피고(EBS와 집필진들)는 타 출판사의 세계사 교과서, 수능시험과 모의고사 기출문제 등의 자료를 참조하거나 인용했을 뿐 A씨의 책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며 저작권 침해 사실을 부인했다. 또한 교과서나 수능·모의고사 기출문제에 A씨 사료번역물이 인용됐다 하더라도 인용출처가 제대로 표시돼 있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고의·과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EBS는 집필진들의 문제일뿐 EBS의 책임이 없다는 주장도 내놨다. 집필진들의 집필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완성된 원고를 제출받아 그대로 출판하므로 집필진에 의한 저작권 침해 여부를 감독·심의할 주의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EBS 수능교재와 A씨 책의 목적이 다르다고도 했다. EBS 측은 ‘EBS 수능특강’은 수능 출제 형식의 연습문제로 구성했고 A씨의 책(수업용)과 목적이 달라 사료번역문을 각색해 인용했다고 ‘동일성유지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EBS 교재가 상업·영리적인 게 아니라 공적인 목적으로 발행된 책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EBS 수능교재는 EBS의 주요 수입원이다. 집필진 5명은 EBS 수능교재 발행 당시 고등학교 역사과목 교사였고, 이후 일부는 EBS 수능교재 집필 등을 경력 삼아 사교육계로 진출했다. 

▲ EBS 로고
▲ EBS 로고

 

재판부는 한국저작권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를 참고해 A씨의 번역물을 저작권법 보호대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고, EBS 교재에 실린 사료번역물은 A씨 저작물과 유사성이 인정된다고 봤다. 집필진들이 역사 교사였기에 교재 집필 당시 양질의 사료번역문 자료인 A씨 책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판단했다. 이에 저작재산권으로서 복제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EBS 수능교재’가 공익적 목적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EBS는 기본적으로 교육기관 내지 교육지원기관이 아니고 EBS 교재는 직접 학교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필수적 교재가 아니라 EBS 방송과 온라인 강의를 위한 선택적 보조 학습교재로 제작하는 것”이라며 “종이책으로 발행해 시중 서점 등에서 수험생들에게 유상으로 판매하고 EBS는 이를 통해 재원 마련을 위한 수익사업을 영위하므로 영리적 목적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EBS 측은 A씨의 책과 EBS 수능교재의 목적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는 손배액을 줄이기 위한 주장으로 해석된다. 이에 재판부는 “A씨 책은 세계사 수업시간에 활용한 사료를 모아 출간한 것으로 그 자체로 학습교재이고 각종 사료번역물이 그대로 각종 교과서와 수능·모의고사 지문으로 자주 인용돼 왔으므로 (두 책의) 주요 독자층은 학생과 수험생으로 상당 부분 중첩된다”며 “EBS 수능교재가 A씨 책의 현실적·잠재적 수요를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EBS 측은 성명표시권(출처 표기)에 대해 수능대비 문제집이기 때문에 출처를 표시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문제에 따라 나온 문제에 등장한 지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시험문제 자체에 인용 출처를 표시할 수는 없지만 문제 해설부분이나 책 말미에 적절한 방법으로 인용출처 표시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고 인용표시가 문제집의 기능을 해한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동일성유지권에 대해 EBS는 저작권법에서 제한사유인 ‘학교교육 목적상 부득이한 경우’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EBS가 저작권법에서 정한 학교, 교육기관·교육지원기관이 아니다”라며 EBS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리적으로는 EBS 측이 잘못했다며 A씨 손을 들어준 판결이다. 

▲ A씨와 EBS 측의 또 다른 저작권 소송이 진행 중이다. 사진=pixabay
▲ A씨와 EBS 측의 또 다른 저작권 소송이 진행 중이다. 사진=pixabay

 

다만 A씨는 손해배상액 책정에서 EBS 측의 입장을 주로 반영했다며 항소를 검토 중이다. 재판부는 EBS 교재의 책값(판매단가), 판매량, 무단이용 비율(약 7%), 판매이익 비율 등을 종합해 피해액수를 산정했다. 

EBS가 연구용으로 발행해 교사 등에게 무료배포한 서적이 있는데 A씨는 “이미 정가를 산정할 때 연구용 서적을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무료배포한 책을 판매부수에서 제외해선 안 된다”며 “연구용 배포 역시 영리 목적과 결부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정신적 손해배상(위자료) 명목으로 100만원을 산정했다. A씨는 “저작권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액수”라는 입장이다. 판결문을 보면 각종 저작권 침해(성명표시권, 동일성유지권 등)돼 위자료를 책정했다. 

재판부는 “학습자료 내지 문제지문 형태로 인용한 정도에 불과하다”, “번역저작물에 대한 창작성의 정도는 통상 저작물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낮다” 등의 표현을 판결문에 썼다. A씨는 미디어오늘에 “법원에서 무슨 근거로 번역물의 창작성이 떨어진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번역저작물이라는 이유로 100만원 받고 끝내라는 식이면 앞으로 누가 번역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재판부는 “EBS 측이 A씨 책을 직접 인용했을 것이라기보다는 교과서나 수능·모의고사 기출문제에서 간접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EBS는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특수한 공익적 목적으로 발행했고 집필진 역시 학교 교원으로 공익적 차원에서 집필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등의 표현을 판결문에서 사용했다. 

A씨는 “집필진이 얻은 수익을 고려해야 하고, EBS 수능특강 집필진을 경력으로 사교육계나 방송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법리적으로 내 주장이 인정됐는데도 배상액 책정에는 EBS에게 유리한 판단을 하고 있는데 이게 상급법원을 포함한 법원의 공통된 입장인지 다퉈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A씨가 EBS 측에 제기한 소송은 하나 더 있다. A씨는 EBS 측이 자신의 저작물을 무단전재한 것을 깨닫고 2018년 12월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이후 추가로 무단전재 사실을 발견해 2019년 12월에 두 번째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판결은 2019년 12월에 제기한 두 번째 소송 결과로 무단전재를 다투는 부분이 ‘2010 EBS 수능특강’에 불과했다. 2018년 12월에 제기한 소송은 2008~2017년 EBS 교재 18권과 2011~2018년 동영상 강의로 다툴 부분이 더 많아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관련기사 : EBS 수능교재, 현직교사 교재 무단전재했나]
[관련기사 : EBS, 저작권 침해 논란 동영상강의 내리기로]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