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고위 인사와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과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을 향해 사퇴 압박성 발언 또는 모호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과거 유사 사건의 판례가 주목을 받고 있다. 대법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수석, 장관 등이 노태강 전 국장 및 1급 공무원들에 사표 압박한 행위를 유죄로 판단한 바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한상혁 위원장과 전현희 위원장에 각각 “윤 대통령과 철학도 맞지 않는 사람 밑에서 왜 자리를 연명하느냐, 정치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17일 MBC 인터뷰)며 “새 정부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것은 몰염치한 일”(10일 조선일보 인터뷰)이라고 밝혔다. 박성중 국회 과방위 국민의힘 간사도 지난 16일 한 위원장에게 물러나라고 공개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윤석열 정부는 두 위원장의 국무회의 참석도 막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7일 출근길에서 ‘(두 위원장이) 물러나줬으면 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임기가 있으니 자기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밝혀 모호한 표현을 썼다.

이 같은 압박에 한상혁 방통위원장은 20일 ‘거취 논란이 방통위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지적도 있다’는 질의에 “그런 말씀은 여러 차례 드린 것 같고, 최대한 성실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말씀으로 정리할게요”라고 밝혀 사실상 사퇴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전현희 권익위원장도 18일 “법률에 정해진 공직자의 임기를 두고 거친 말이 이렇게 오가는 상황에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제 거취는 법률이 정한 국민 권익 보호라는 그 역할에 성실히 수행하면서 법과 원칙을 고민하고 국민들의 말씀을 차분히 경청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법이 정한 임기를 채울 것이고, 사퇴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과 청와대 고위 인사 등이 고위공직자를 사퇴 압박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참고할 만한 판례가 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등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 피고들의 대법원 판결문이다. 이 사건은 일부 혐의가 파기 환송돼 아직 서울고법에서 재판 중이지만 ‘직권 남용’ 혐의는 모두 유죄로 확정됐다. 대법원 전원협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지난 2020년 1월30일 김기춘 전 실장 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노태강 전 국장과 문화체육관광부 1급 공무원들에 대한 사직 요구가 직권 남용이라고 판단한 원심(서울고법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심 재판부 판결을 들어 “김상률 전 수석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노태강 전 국장에 대한 사표 제출 지시를 직접 문체부 장관에게 전달했고, 문체부 장관과 소속 공무원들에게 그 이행 여부와 노 전 국장이 보임될 산하기관에 관해 직접 확인하고 의견을 전달하기까지 했다”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에 관한 기능적 행위 지배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사직서 제출 요구 지시, 김 전 수석이 지시를 문체부 장관에 하달, 장관의 사직서 제출 요구는 각각 대통령, 수석과 장관의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행위”라며 “김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직권을 남용한 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이 판단이 법리를 오해하거나 논리와 경험 법칙에 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는 잘못이 없다며 이를 확정했다.

▲대법원이 지난 2020년 1월30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블랙리스트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심에서 일부 혐의(판단)에 파기환송 결정을 하면서도 판결문에서 직권남용 부분을 유죄로 판단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강조표시
▲대법원이 지난 2020년 1월30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블랙리스트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심에서 일부 혐의(판단)에 파기환송 결정을 하면서도 판결문에서 직권남용 부분을 유죄로 판단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강조표시

 

또한 대법원 재판부는 원심 재판부가 문체부 1급 공무원의 사직서 제출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그들의 의사에 반해 면직을 당한 것”이라며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 피고인 5 등과 공모하여 위와 같이 사직서 제출을 요구한 것은 이들이 문화 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의 집행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에서 자의적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직권 남용에 해당한다고 봤다.

이 같은 판단은 대통령부터 청와대 수석, 장관을 거쳐 상급자를 통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직 요구에 따른 행위였다는 점에서 권성동 원내대표와 같은 여당 지도부의 대 언론 사퇴 압박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뜻을 따르지 않는 이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한상혁 방통위원장과 전현희 권익위원장의 자리는 법률에 ‘독립성’을 부여하고 있고, 임기와 신분을 보장하는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용산 집무실 출근길에서 한상혁 방통위원장과 전현희 권익위원장 거취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SBS 영상 갈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용산 집무실 출근길에서 한상혁 방통위원장과 전현희 권익위원장 거취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SBS 영상 갈무리

 

‘방통위원장,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약칭 : 방통위법)의 제1조(목적)를 보면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 및 공익성을 높이고 방송통신위원회의 독립적 운영을 보장함으로써 국민의 권익 보호와 공공 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 제7조는 임기 3년을 보장하고 있고, 제8조는 ‘심신 장애, 직무상 의무 위반, 부당이득 취하는 행위,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의사에 반해 면직되지 않는다. 직무 수행시 외부의 부당한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제8조 제2항).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약칭:부패방지권익위법)을 보면, 국민권익위원회는 ‘정부조직법 제2조’에 따른 중앙행정기관으로서 그 권한에 속하는 사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11조 제1항). 이 법 제16조는 “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한다”고 규정해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방통위원장과 마찬가지로 권익위원장 임기도 3년이며, 심신 장애, 겸직 금지 의무 위반, 결격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한 ‘그 의사에 반하여 면직 또는 해촉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16조 제3항)

방통위원장과 권익위원장 모두 사퇴 의사가 없다고 밝힌 상태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이 20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의 거취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YTN 영상 갈무리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이 20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의 거취 관련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YTN 영상 갈무리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이 지난 18일 서울 변호사회관 앞에서 기자들의 거취 관련 질의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YTN 영상 갈무리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이 지난 18일 서울 변호사회관 앞에서 기자들의 거취 관련 질의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YTN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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