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와 진보 진영 인사들을 비판했던 언론인을 조롱·희화화한 미술 작품에 한국기자협회와 일부 언론사가 민·형사 소송을 예고하는 등 ‘기자 캐리커처’를 놓고 언론계와 예술계 사이 갈등이 커지고 있다.

서울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하 서울민예총)은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광주광역시 메이홀에서 전시회 ‘굿, 바이 전’을 개최하고 있다. 논란을 부른 ‘기자 캐리커처’는 이곳에 전시한 서울민예총 시각예술위원회 박찬우 작가 작품으로 전·현직 언론인 및 방송·정치인 110명을 우스꽝스럽게 캐릭터화하고 얼굴에 분홍색을 덧칠한 그림이다.

▲ 서울민예총이 6월1일부터 15일까지 광주광역시 메이홀에서 개최하는 전시회 ‘굿바이 시즌2’ 포스터.
▲ 서울민예총이 6월1일부터 15일까지 광주광역시 메이홀에서 개최하는 전시회 ‘굿바이 시즌2’ 포스터.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3일 “언론과 언론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언론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이번 전시회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한 데 이어 7일엔 각 회원사에 전시회로 피해를 입은 회원을 모집하여 주최 측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은 7일 통화에서 기자 캐리커처에 “‘내 편이 아니면 개혁에 방해되므로 적으로 규정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하다”며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자 얼굴을 희화화하고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에 다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한국일보도 서울민예총에 내용증명을 보내 “전시회를 강행하는 경우 기자 별로 해당 전시일수에 따라 계산한 금액을 기초로 하여 인격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며 “별도로 해당 작가에 대해서도 민·형사상 법적 조치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편집국도 지난 4월 박 작가에게 “귀하의 일부 캐리커처와 글은 비판의 도를 넘어 기자 개개인 인격까지 훼손하고 있다”며 캐리커처를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납득할 만한 조치와 답변이 없을 경우 법적 대응에 나설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와 관련 박 작가는 지난 5일 유튜브 ‘김성수TV 성수대로’에 출연해 “언론 개혁에 관해 비평 카툰은 있었지만 기자 개인을 상대로 한 작품은 미술사에 없었다”며 “사실을 기반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박 작가는 이 방송에서 “없는 걸 사실화하고, 있는 걸 지운다는 면에서 언론과 검찰 논리를 비슷하다”며 “기소를 하느냐 마느냐처럼 기사를 1면에 싣느냐 단신으로 처리하느냐, 이런 것이 검찰 논리와 같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언론이 허위뉴스, 가짜뉴스를 실수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사과를 반드시 해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개선해야 한다”며 “언론은 기자들이 쓰는 ‘공공의 일기’라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일기가 역사가 된다. 그런 차원에서 가짜뉴스는 역사 왜곡이다. 역사 왜곡이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언론부터 바로 서야 한다”고 밝혔다. 기자 캐리커처에 분홍색을 덧칠한 이유에 대해서는 “핑크색을 좋아한다. 돋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어떤 기준으로 기자들을 선별해 풍자의 도마 위에 올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그의 SNS와 캐리커처에 담긴 말풍선 등을 통해 풍자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이를 테면, 한 보수 일간지 기자도 풍자 대상이 됐는데 그의 캐릭터 옆에는 “대통령 딸 자녀와 ‘靑 거주’ 아빠 찬스 논란”이라는 말풍선이 그려져 있다. 이 기자는 지난해 11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 딸이 청와대 관저에서 1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문 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로선 불편한 기사다.

▲ 손병휘 서울민예총 이사장(왼쪽)과 박찬우 작가가 지난 5일 유튜브 ‘김성수TV 성수대로’에 출연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성수TV 성수대로 화면 갈무리.
▲ 손병휘 서울민예총 이사장(왼쪽)과 박찬우 작가가 지난 5일 유튜브 ‘김성수TV 성수대로’에 출연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성수TV 성수대로 화면 갈무리.

박 작가는 2년 전부터 SNS에 기자들의 증명·방송 사진과 이를 캐릭터화한 분홍색 캐리커처를 함께 업로드 해왔는데, 상당수 게시물에는 ‘리포트래시’ 홈페이지 주소가 인용되어 있다. 이 사이트는 이른바 ‘기레기 박제’를 목적으로 하는데 문재인 정권과 진보진영에 비판적인 기사들을 수집해놓고 있다. 이 사이트에 “특정 정치 세력의 좌표 찍기에 이용되며 자유로운 언론 활동을 침해하고 있다”(허은아 국민의힘 의원)는 비판이 제기된 적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보수 유튜버 ‘가로세로연구소’ 진행자 강용석, 김세의, 김용호씨나 ‘조국 흑서’ 저자 서민 교수 등 자타공인 보수 인사들이 적지 않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검증했던 KBS·SBS·신문사 법조 기자들이나 문재인 정권 인사를 검증·비판했던 기자 상당수가 주요 풍자 대상이라는 점에서 논란이다.

금태섭 전 의원은 지난달 31일 “예전 권위주의 시절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빨갱이 딱지 붙이던 짓과 뭐가 다른가”라며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이런 폭력적인 짓이 벌어지는데 자칭 진보라는 민주당에서는 한 사람도 나서서 꾸짖거나 말리는 사람이 없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기억 같은 건 다 잊은 건가”라고 비판했다.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7일 미디어오늘에 “기본적으로 상대를 어떻게 표현하건 물리적 해를 끼치는 게 아닌 한, 그리고 사실관계를 호도하지 않는 한, 창작자 자유를 믿는 쪽”이라면서도 “올 초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후보를 편파적으로 비하하는 영화와 전시회가 좌파 진영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최근에는 조국 전 장관을 편파적으로 비호하는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는데 ‘굿바이 시즌2’ 전시와 이런 영화들은 동일한 정신적 배경 위에서 제작됐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이어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범좌파 진영의 지금 처지는 더는 정치적 약자가 아니다. 과거와는 다른 정치적 위상과 헤게모니를 쥔 민주당 진영을 선한 자로, 민주당에 반대하는 진영을 악한 자로 양분하는 예술은 풍자가 생략된 일방적 선전물에 가깝다”고 지적한 뒤 “그래도 이런 수준의 작품과 전시가 열리는 걸 막을 순 없거니와 막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예술이 ‘정의감이 충만한 후진 예술’인 점을 이해하고 동조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박 작가를 포함해 서울민예총 시각예술위원회 ‘굿바이전’ 작가 18명은 지난 4일 “박찬우 작가 작품에 대해서 불만이 있고, 불편하고, 껄끄러우면 그렇게 표현하면 된다. 전체 18명의 작가가 문재인 정권만을 지지하고 따르는 작가들로 호도한 발언에 대해서는 예술가로서 심히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다”며 “이런 식으로 정파 프레임으로 예술가들을 가두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프레임만으로는 기자들의 심각한 진실 왜곡과 본질을 호도한 행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주장했다.

굿바이전 작가들은 “언론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가짜뉴스나 허위뉴스를 내보낸 기자들부터 반성하는 것이 먼저”라며 “18명의 작가는 언론개혁이라는 대의를 갖고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도 박찬우 작가 한 명의 작품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싸잡아 비난하는 행위야말로 예술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권력자들’의 시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손병휘 서울민예총 이사장은 7일 통화에서 “기자협회와 성명을 주고받은 만큼 현재는 상황을 주시하는 중”이라며 “서울민예총은 특정 정파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결사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본지는 박 작가 입장과 생각을 직접 듣고자 주최 측과 박 작가 개인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질의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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