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적 모순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대표자(지배자)와 국민들(피지배자)의 경계가 분명하다는데 있다. 대표자는 유권자들의 대리자를 넘어 지배자로 군림하는데 사회계약론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만드는 법질서를 마치 전 국민이 합의한 것처럼 간주한다.

우리가 언제 현행 법질서에 하나하나 합의했었나? 그냥 합의한 것으로 퉁(?)치는 과정에서 다수가 참여해야 할 민주주의는 소수가 지배하는 대의제로 변했다. 이때 권력자들은 선후관계를 뒤집는다. 유권자들의 현실적 이유로 소수의 대표자에게 권력을 위임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엄격한 잣대로 정치인들에게 준법정신을 요구하는 것인데, 권력자들은 다수 국민이 합의했으니 국민에게 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이를 ‘법치주의’라고 주장한다.

국민 개개인이 모두 주인이어야 할 사회에서 집권당 등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고 ‘법을 지키라’고 시민들을 겁박할 때 민주주의는 실종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를 ‘불법시위’로 규정했다. 이 대표는 지난달 28일 “윤석열 정부에선 불법시위를 해야 의견이 관철된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고 했다. 앞서 지난달 25일 전장연 시위에는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시위하는 시민들 요구를 왜곡해 마음대로 규정하면서 나온 발상이다. 지난달 27일 전장연의 시위를 “3·4호선 상하행선을 모두 마비시키는 목적”이라고 했다. 과연 시민 불편이 전장연의 목적일까? 장애인의 권리보장이 목적일까? 당연히 장애인 이동권을 시작으로 장애인도 인간으로서 다양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 대표의 주장은 왜곡이다.

문제는 ‘불법’이란 낙인을 씌우면 본연의 요구내용을 묵살당한 채 비난을 받게 된다. 그들이 왜 불편을 줄 수밖에 없는지, 혹은 불법까지도 감내해야 할 상황에 내몰렸는지 살피지 못하게 만든다. 장애인 혐오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다수 시민도 ‘불법’에는 거리를 두며 심리적으로 해당 시위에 거리를 두게 된다. 최근 전장연의 출근길 시위를 비롯해 다양한 시민들의 시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불법’ 여부일까?

▲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창비 펴냄
▲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창비 펴냄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의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소개한 ‘시민불복종’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법도 때로는 부당하다(164쪽)”며 공교롭게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등급제 폐지 등을 요구하며 시위하다 기소된 사건을 예시로 들었다. 2019년에 출판한 이 책에도 나오듯 오랜 세월 전장연의 이동권 보장 시위는 다수 시민과 정치권의 관심보다는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다뤄지던 이슈였다.

장발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인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이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구조적 불평등을, 경미한 법 위반한 가난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집회와 시위를 하다 벌어지는 많은 형사처벌이나 절도 등 특정 형벌은 사실상 사회적 약자·소수자에게만 적용하는 법이다. 다수의 결정, 강자의 결정이 일부 소수의 권리보장에 소홀했다면 결국 이 소수는 기존 법질서에 온전히 포섭되지 못한다. 법치란 이름으로 ‘치안’만 강요할 게 아니라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의 고충을 정치권이 받아내야 한다.

김 교수는 존 롤스의 정의론의 일부도 인용했다. “사회가 동등한 사람들 간의 협동체제로 해석되는 경우, 심각한 부정의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복종할 필요가 없다.” 또한 김 교수는 “시민은 단순히 통치당하는 게 아니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민불복종’이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의를 이루는 방도”라고 했다. 모두가 주인이라면, 소수자 입장에서 내 뜻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위법행동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문제 상황을 알리는 행위’다. 즉 ‘불법시위’처럼 ‘불법’이 핵심이 아니라 일종의 ‘말 걸기’라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이 대표의 혐오 발언과 이 사안을 전하는 다수 언론이 간과한 부분이 장애인들의 ‘말 걸기’ 부분이다.

이 책에는 인종분리정책에 저항하느라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기소된 마틴 루서킹이 기소된 사건이 나온다. 백인 입장에서 마틴 루서킹은 그저 불법시위자다. 대의제와 사회계약론이라는 허상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법을 만드는 과정과 법에서 배제한 사람은 없는지 끊임없이 조명해야 한다. 다수가 합의했기에 법은 지켜져야 하지만 동시에 다수가 합의했더라도 법은 그 자체로 의심받을 수 있다.

▲ 장애인 이동권 시위 현장에 참석한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사진=KBS 보도 갈무리
▲ 장애인 이동권 시위 현장에 참석한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사진=KBS 보도 갈무리

 

장애인들의 다양한 시위가 있었다. 결말은 사회 다수의 태도로 달라진다. 장애인활동가의 요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면 ‘비폭력 시민불복종’은 대화로 마무리되지만 대신 공권력을 투입하면 기소·재판으로 마무리된다. 무엇이 차별이고, 무엇이 문명적 판단인지 책에 나온 다양한 사례와 학자들의 주장으로 고민해볼 수 있다.

[관련기사 : 윤석열·이준석, 샌델이 지적한 ‘능력의 폭정’과 무관한가]

지난번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서평에서 ‘능력주의’가 실패자에 대한 무시를 정당화하고 승자의 오만한 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능력주의를 주장한 이 대표가 쉽게 약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내뱉는 현상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었는데,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도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이 책에선 “능력은 하나가 아니며 그 사람의 전부도 아니다(113쪽)”란 문장으로 능력주의의 한계를 설명한다. 대학입시 ‘성적’만을 기준으로 나눈 우열반을 예시로 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결과 ‘특반’ 학생의 88.9%는 반편성에 만족하지만 ‘평반’ 학생의 78.5%는 반편성에 불만족했다고 한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사진=국민의힘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사진=국민의힘

 

세상에 수많은 잣대, 다양한 정체성이 있는데 하나의 임의적인 기준으로 우열을 갈라놓으면 머지않아 다름을 넘어 인격 자체를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책에서 인용한 2017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실태조사를 보면 28.3%의 아동·청소년이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차별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적이 낮은 건 범죄도 아니고 타인에게 해를 끼친 일도 아니다. 부당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능력의 일환으로 치부되는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낮아서 당하는 차별이 아닐까? 장애인들이 차별받는 이유도 그들의 노동력이 열등하다고 평가받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대다수 정치인이나 사회 기득권층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주제다. 하지만 전장연이 아닌 많은 시민과 관련한 문제다. 노인이나 유아차를 끌고 나온 보호자, 비장애인이더라도 일시적으로 부상당한 경우 등 모든 교통약자가 크고 작게 겪는 공적인 문제다. 능력주의에 기초한 약자혐오는 소수자의 주장을 공론장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김 교수는 책에서 “우리는 교육을 통해 불공정한 능력주의를 배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불합리한 구분을 일삼는 불평등 사회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새삼 두려워진다(116쪽)”고 썼다. 이 대표와 같은 혐오에 동조한 적은 없지만 ‘불법’은 무조건 옳지 않다고 비판했거나 약자가 차별받는 현실을 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체념했다면, 우리도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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