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BL(Boy’s Love)이 대세 장르로 떠올랐다. 그 유명한 김수현 작가마저 작중 동성 커플을 등장시켰다가 기독교 단체의 거센 항의에 대본이 일부 편집되는 굴욕을 겪어야 했던 때를 기억한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개개인의 취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OTT 시대가 오면서 음지에서 소비되던 BL은 양지로 끌어올려졌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과 같이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글로벌 OTT에 밀려 고전하던 왓챠에게, 적은 제작비로도 신선함과 화제성을 함께 끌어올 수 있는 BL은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장르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BL은 음지에서 소비되었을지언정, 꽤 오래전부터 ‘돈이 되는’ 장르였다. 10대 시절 아이돌 그룹 멤버들 간의 동성애를 다룬 팬픽을 읽던 소녀들이 자라 구매력을 갖추게 되고, 이들과 함께 리디 레진코믹스 봄툰 포스타입과 같은 유료 웹소설 플랫폼도 성장했다. 시장이 커지자 장르도 다양해지고 콘텐츠의 질도 좋아졌다.

BL은 남자끼리 사랑하는 이야기지만, 여성이 쓰고 여성이 소비하는, 명백한 여성의 장르다. 1960년대 비틀스, 롤링스톤스 팬들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믹 재거와 키스 리차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거라 믿었다는 걸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 팬들은 멤버들이 자기들끼리 사랑하길 바랐던 모양이다. 이러한 팬들의 정서는 자연스럽게 팬픽을 등장시켰고, 열광하게 했다.

유독 아시아권에서 두드러지는 BL의 인기를 ‘여성이 성적 욕망을 드러낼 수 없는 여성의 인권이 억압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여성의 일탈이자 판타지로서 BL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BL은 19세 이용가 작품이 인기가 많고, 이성애물에서는 금기시되는 폭력적이거나 가학적인 설정도 많다.

여성들이 이러한 설정을 ‘판타지’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한때 ‘더 이상 설레지 않습니다’ 캠페인을 통해 비판받은 한국 드라마 속 로맨스의 폭력적 클리셰까지 옹호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더 이상 맨정신으로는 즐길 수 없게 된 폭력적 클리셰는 여성의 이입이 완벽하게 차단된 남성 간의 로맨스 안에서만 용인된다.

▲ 리디북스 웹소설 ‘시맨틱 에러’ 포스터와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 포스터. 사진=리디북스, 왓챠
▲ 리디북스 웹소설 ‘시맨틱 에러’ 포스터와 왓챠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 포스터. 사진=리디북스, 왓챠

<시맨틱 에러>는 2018년 리디북스 BL 소설 부분 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검증된 스토리를 자랑하는 데다, ‘BL 입문서’로 불릴 만큼 호불호가 덜 갈리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실사화에는 여러 우려가 뒤따랐다. 앞서 제작된 BL 영상물들이 부족한 완성도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고, 장르적 특성상 연기 경력이 부족한 신인들이 주인공을 맡아 어색한 연기력으로 이입을 방해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음알음 향유하던 문화가 양지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컸다. BL의 하위 분류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알페스 논란으로 위축된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우려를 딛고, <시맨틱 에러>는 흥행에 성공했다. 공개 직후 왓챠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며 BL 원작 드라마를 대중적으로 성공시킨 첫 작품이 됐다. 특히 BL 소비층인 10~30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는 <시맨틱 에러>의 클립 영상과 시청 후기를 공유하는 이들로 북적이고, 주연인 박서함과 박재찬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지난 아이돌 활동까지 주목받고 있다.

드라마 흥행에 힘입어 원작 소설 관련 거래액도 크게 늘었다. 리디에 따르면 원작 소설의 경우 드라마 공개 첫날 거래액이 방영 기념 이벤트 진행 전 대비 916% 폭증했고, 동명의 웹툰 역시 드라마 공개 이후 1주일간 거래액이 전월 동기 대비 312% 증가했다고 한다.

BL 콘텐츠의 잠재력을 확인한 만큼, BL 영상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사화가 확정된 인기 작품도 벌써 여럿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높다. 지난 19일 열린 BL 웹드라마 <나의 별에게> 팬미팅은 행사를 불과 5일 앞두고 장소를 변경해야 했다. 제작사에 따르면 공연장 측은 ‘부적합한 공연’이라는 이유로 대관을 취소했다는데, ‘동성애’를 주제로 한 드라마 관련 행사라는 것이 대관 취소의 이유라는 거다.

결국 송창의와 이상우의 언약식 장면과 키스신을 방송에 내보내지 못했던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벌써 12년 전 작품이다. 그 사이 BL은 더 이상 음지 문화에 머물지 않는, 돈이 되는 장르가 됐음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그저 혐오와 편견의 대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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