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범죄를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는 그중 대표 주자다. ‘꼬꼬무’는 과거 현대사를 뒤흔든 굵직한 사건들을 이야기꾼(진행자)과 이야기친구(게스트)의 일대일 대화를 통해 소개한다. 이야기꾼은 유려한 말솜씨로 사건을 마치 어제 본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설명해주듯 이야기하고, 시청자는 이야기꾼과 이야기친구의 친밀도에서 나오는 사적이고 친밀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대화를 함께 들으며 높은 몰입감으로 사건에 빠져든다.

누군가 지어낸 것이 아닌 실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인 만큼, 검증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꼬꼬무’처럼 이야기를 통한 공감과 이해가 주요 정서인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이 전달하는 정보가 잘못되거나 왜곡되었을 경우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고 분노한 시청자의 공감 정서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꼬꼬무’는 1992년 발생한 LA폭동을 다뤘다. LA폭동은 1991년 음주운전 후 도주하던 흑인 로드니 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폭행을 가한 백인 경찰 4명이 무죄 판결을 받자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폭동’으로도 불리는데, 분노한 폭도들은 코리아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고, 한인 상점 약 2300곳이 약탈당하거나 전소됐다.

▲ 지난 2월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꼬꼬무) 16회 ‘“타깃은 코리안” 코리아타운을 공포에 떨게 했던 1992년 그날!’ 예고편.
▲ 지난 2월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꼬꼬무) 16회 ‘“타깃은 코리안” 코리아타운을 공포에 떨게 했던 1992년 그날!’ 예고편.

흑백갈등에서 촉발된 분노의 타깃이 한인 타운을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꼬꼬무’는 한인 사회를 향한 흑인들의 불만 정서를 이유로 들며, 그 원인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한인들이 흑인 지역 가게를 하나둘 접수하자 박탈감과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인 상점에서 도둑으로 몰렸던 불쾌한 경험, 흑인을 상대로 돈을 벌면서 흑인을 무시하는 한인들에 대한 분노에 대한 언급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LA폭동을 설명할 때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되는 하나가 빠졌다.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 LA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던 한인 두순자는 오렌지 주스를 사러 온 15살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라는 흑인 소녀를 도둑으로 오인, 몸싸움을 벌이다 권총으로 조준 사격해 사망하게 했다. 당시 재판부는 재범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를 들어 두순자에게 400시간의 사회봉사명령과 500달러 벌금, 5년 보호관찰 판결을 내린다. 여기에 로드니 킹 사건 가해 경찰마저 무죄 판결을 받자 흑인 사회는 분노했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이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이들은 그 사법 시스템을 무시하고 폭주한다. LA폭동의 시작이었다.

분노의 이유는 정당했으나 그 분노를 애먼 이들을 향한 약탈과 방화, 폭력으로 표출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드니 킹 사건’, ‘두순자 사건’을 빼고 LA폭동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 중, 어떤 내용을 부각하고 어떤 부분을 생략할지 결정하는 것은 제작진의 영역이라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제작진은 방송 초반 아이스큐브의 ‘Black Korea’까지 소개했다. 노래에 담긴 한인을 향한 공격적인 가사는 소개하고, 그 곡의 탄생 배경인 두순자 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왜곡이다.

방송이 나간 후 나와 이웃의 재산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선 한인들의 용기와, 큰 피해를 입고도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아름답고 성숙한 대처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로드니 킹이 당한 폭력 진압에 분노하고, 2020년 ‘Black Lives Matther’ 시위를 촉발시킨 조지 플루이드 사건과 비교하는 반응도 많았다. 하지만 라타샤 할린스와 관련된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 라타샤 할린스 (Latasha Harlins)
▲ 라타샤 할린스 (Latasha Harlins)

위대한 흑인 래퍼인 투팍은 곡 ‘Something 2 Die 4’에 “라타샤 할린스. 그 이름을 기억해야해. 주스 한 병 때문에 죽을 건 아니잖아”라는 가사를 썼다. 투팍은 자신의 곡에 여러 차례 라타샤 할린스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는 라타샤 할린스의 이름과 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공포와 분노로 가득찼던 1992년의 그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LA폭동 30년을 맞아 라타샤 할린스를 재조명하고 추모하고 있는 미국. 로드니 킹과 조지 플루이드는 기억하면서 라타샤 할린스는 기억하지 않는 한국. 편향된 정보는 몰이해를 낳고, 또 다른 갈등을 낳는다. ‘꼬꼬무’가 생략한 그날의 이야기기를 우리가 이렇게라도 언급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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