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회장 이동걸)이 ‘키코 사태’와 관련해 이동걸 산은 회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쓴 기자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했다.

서울남부지법 민사5단독 최희준 판사는 지난 9일 산업은행이 스포츠서울이 보도한 기자칼럼에 대해 기자 개인을 상대로 제기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하도록 했다. 

앞서 스포츠서울은 2020년 10월18일 ‘이동걸의 이상한 논리 “키코, 불완전판매 했으나 불완전판매 아니다”’란 제목의 칼럼을 냈다. 권오철 당시 스포츠서울 기자는 칼럼에서 이 회장이 국정감사에서 중소기업들에 키코를 판매하며 “(키코 옵션의) 가격정보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시인하면서도 “불완전판매가 아니”라고 말한 점을 비판했다. 키코 사태란 은행에서 판매한 ‘키코’라는 통화옵션상품으로 중소기업 50여곳이 줄도산 하는 등 700여곳이 3조 규모 피해를 본 사태를 말한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사진=민중의소리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사진=민중의소리

산은 측은 보도 직후 스포츠서울 측에 이 회장이 기사 제목의 “불완전판매 했으나 불완전판매 아니다”라는 문장을 말한 적 없다며 정정을 요구했고 스포츠서울 측은 인용 표기를 작은따옴표로 수정했다. 산은은 이후 권 기자를 상대로 손배 청구에 나섰다.

산은의 이번 소송은 비판 칼럼에 기자 개인을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어서 보복성이 짙다는 언론계 비판을 받아왔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지난해 1월 “산은은 국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기자 개인에 대한 입막음용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그릇된 판단을 보이고 있다”며 “당장 소송을 취하하고 대국민 사과에 나서라”고 성명을 내 밝혔다.

재판부는 “큰따옴표가 보통의 경우 인용의 의미로 쓰이지만, 강조의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다 이 사건 최초 기사의 내용을 일반인이 보통의 주의를 가지고 읽었을 때 이동걸 회장이 큰따옴표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생각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 회장이 키코 상품 판매가 불완전판매였음을 인정한 것처럼 오해하도록 해 산은 신뢰도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했다’는 산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키코 사태가 불완전판매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언론의 자유가 중요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주장되는 것도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2020년 10월18일 스포츠서울 칼럼
▲2020년 10월18일 스포츠서울 칼럼

재판부는 산은이 문제 삼은 표현인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도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이 회장의 논리는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과 동일하다”는 문장을 두고도 산은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권 기자)의 논평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이는 데다, 권 기자가 위 기사에서 강조한 것은 권 기자가 불완전한 판매라고 주장하는 산은의 가격정보 부제공 사실을 이 회장이 인정했다는 것”이라며 “결국 권 기자는 이를 전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논리를 이 사건 기사를 통하여 논평형식으로 주장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재판부는 “그렇다면 원고의 청구는 이유 없어 이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권 기자를 대리하는 조상규 변호사(법무법인 주원)은 1심 판결에 “산은이 손해액이 특정되지 않은 무리한 소송을 진행한 당연한 결과”라며 “산은은 국민의 혈세로 언론탄압을 자행한 셈이다. 이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코 피해기업들이 꾸린 키코공동대책위원회는 11일 성명을 내고 “산은은 언론중재위원회나 형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사 송고의 권한이 있는 스포츠서울을 배제한 채 기자 개인에 1억원 배상이란 재갈을 물리려 했다”며 “권 기자의 승리를 축하며, 이 회장은 국책은행장이라는 권력을 남용하고 국민의 혈세를 들여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잘못을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하라. 키코의 불완전판매를 인정하고 피해 기업들에 대한 배상을 이행하라”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가 불완전판매를 인정하지 않은 데에는 “안타깝게도 판사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오해한 것”이라며 “대법원은 키코의 사기성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불완전판매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금융감독원은 대법원의 일부 불완전판매 인정을 바탕으로 과거 재판을 치르지 않은 기업들을 재조사해 배상을 권고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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