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삶은 그럭저럭 안정적이다. 자신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고, 아내는 경력 있는 간호사다. 10대가 된 두 아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무던하게 커 나간다. 아픈 데도 없고, 돈 걱정으로 밤잠 설칠 일도 없다. 그런데 친구들과 둘러앉아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문득, 사는 게 지나치게 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치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우울이 눈물로 맺혀 흐르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생전 입에 대지 않던 술 한 잔을 꿀떡, 집어삼켜본다. 낯선 취기가 은은하게 몸을 감싼다.

술 한두 잔. 그게 갈피 잃은 중년에 찾아오는 지독한 우울감을 떨쳐내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매즈 미켈슨 주연의 영화 <어나더 라운드>에서 시작된다. 덴마크에 사는 중년 남자 ‘니콜라이’(매즈 미켈슨)와 그 친구들이 주인공이지만, 국적만 떼어 두고 보면 한국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평범한 부모에게 태어나 밥 굶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고,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도 했고, 무탈하게 아이도 낳았다. 그 사이 집을 넓혔고 차도 바꿨다. 그런데, 그 다음은? 끝나지 않는 ‘스텝’ 안에서 구르다 본연의 내가 지나치게 닳아버린 건 아닌가.

▲ 영화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포스터
▲ 영화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포스터

내가 알았던, 그리고 누렸던 인생의 바로 그 재미를 되찾고 싶은 ‘니콜라이’와 친구들은 실험을 해 보기로 한다.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한 채 일상을 살면 고갈됐던 창의력이 샘솟고 적당한 활력도 얻을 수 있다는 한 연구자의 가설을 따라서 말이다. 놀랍게도, 효과는 있다. 알딸딸한 상태로 교단에 선 ‘니콜라이’는 학생들의 수업 평가와 시선에 무던해진 대신 내면의 자신감을 끌어올린다. 판에 박혔던 역사 수업은 루스벨트, 처칠, 히틀러의 음주 습관 같은 이야기를 들면서 전에 없던 활기를 띤다. 같은 학교에서 음악, 체육, 심리학을 가르치는 그의 친구들도 비슷한 종류의 자극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다. 육아와 가정생활에 지쳐서, 책임질 일을 만들기 싫어서, 교칙의 선을 넘어설 용기가 없어서 접어뒀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술의 힘에 기대 아슬하게 표출한다.

술과 삶의 즐거움 사이의 상관관계를 몸소 실험하는 이 중년들의 이야기는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이 연출했다. 그는 덴마크 사람인데, 한 가지 사실을 알면 영화를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같은 북유럽 국가는 술 판매 시간을 법으로 엄격하게 제한한다. 나라가 국민의 음주 습관을 통제하고 사람들도 그걸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덴마크는 상황이 좀 다르다. 똑같은 북유럽 국가로 분류되지만 상대적으로 남쪽에 위치해 위도는 서유럽 국가인 영국과 비슷하고, 술에 대한 인식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원할 때 언제든 술을 살 수 있고 위태로울 때까지 술을 마셔도 본인의 자유라고 믿는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한데, <어나더 라운드>는 바로 그런 배경에서 불거지는 문제를 가늠하게 한다.

▲ 영화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스틸컷
▲ 영화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스틸컷

반복해서 술잔을 기울이던 주인공들은 기어코 새로운 호기심에 이른다. 어떤 사람은 소주 세 잔에 취하고 어떤 사람은 한 병도 거뜬하듯, 0.05%라는 혈중알코올농도 역시 상대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마신다면, 인생은 더 즐거워질까? 섭취량을 극단으로 밀어붙여본다면, 지루한 일상을 잊게 할 쾌락의 끝에 기어코 도달할 수 있을까?

알코올 중독의 시작을 의미하는 전개 끝에 결국 비극은 찾아온다. 술 좋아해 본 사람은 술로 인한 참사가 제각각 삶마다 얼마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잘 안다. 단계의 경중만 있을 뿐이다. <어나더 라운드>의 비극은 그중에서도 가장 허망한, ‘죽음’이다. 만취한 일상 끝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한 남자의 우울은 그렇게 영원히 종결된다.

▲ 영화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스틸컷
▲ 영화 ‘어나더 라운드 (Another Round)’ 스틸컷

이제 주인공 ‘니콜라이’를 포함한 남겨진 친구들은 깊이 생각한다. 삶이라는 산의 중턱쯤 걸어온 우리는 여기저기 치이고 깎이느라 꽤 지쳤고, 생의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독한 술 한두 잔을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권태와 활기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하나의 시도일 뿐임을 안다. 지금도 누군가는 자기 삶에 가장 적절한 ‘혈중알코올농도 0.05%’를 찾기 위해 오만가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겠지만, 그 끝에 어떤 균형점을 찾아내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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