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국민건강보험공단 국민건강정보 자료제공 심의위원회가 회의 직전 돌연 일정을 연기했다. 이날 회의에선 한화생명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유·관리하고 있는 데이터 제공을 요청한 건에 대한 재심의가 예정됐는데 불과 3시간 전에 무산됐다. 건강보험공단 측은 “충분한 논의와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후 심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데이터 3법’ 통과로 비식별화된 개인정보는 특정한 요건을 갖추면 당사자 동의 없이도 활용이 가능해지면서 민간 보험회사들이 국민건강 정보를 요구해 ‘상품 개발’을 위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삼성생명과 한화생명, 교보생명, KB생명, 현대해상 등 5개 민간보험회사가 건강보험공단의 개인정보 데이터 제공을 요청했으나 ‘거부’됐다. 이후 한화생명의 요구로 ‘재심의’가 예고되면서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2018년 11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디지털정보위원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11개 시민사회단체가 국회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당사자 동의 없는 가명정보의 상업적 활용 등을 반대했지만, '기업의 연구'를 허용하며 사실상 상업적 허용이 가능하게 됐다. 사진=금준경 기자
▲2018년 11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디지털정보위원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11개 시민사회단체가 국회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당사자 동의 없는 가명정보의 상업적 활용 등을 반대했지만, '기업의 연구'를 허용하며 사실상 상업적 허용이 가능하게 됐다. 사진=금준경 기자

 

반대시위 예고에 회의 연기, ‘숙고’ 돌입하나

심의는 왜 미뤄졌을까. 자료제공심의위를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성명을 내고 반발한 데 이어 회의 장소 앞에서 시위가 예고된 상황이었다. 건강보험공단은 25일 “일련의 과정, 특히 회의 장소에서의 시위 등은 공정한 심의를 해야 하는 심의위원들의 판단에 압박감을 줌으로써 심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회의 개최를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민간보험사의 연구용 DB 요청에 대해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개진됨에 따라 이해당사자들과의 충분한 논의와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후 민간보험사 요청 건에 대해 심의하고자 한다”고 했다.

자료제공심의위가 언제 다시 열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기회의는 2주 간격으로 열린다. 심의위원은 14명으로, 내부 위원 7명과 외부 위원 7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내부 위원 1명이 빠져 13명이 심의하고 있다.

한화생명 “한국인 데이터로 상품 개발 필요, 데이터 안전”

한화생명이 제공을 요청한 의료데이터는 2002년~2019년 건강보험 가입자 모집단 2%의 장애, 사망, 진료, 건강검진, 요양기관 현황 자료 등이 담긴 비식별(개인정보가 드러나는 내용을 지운) 표본이다. 즉 이 자료를 통해 개개인이 어떤 진료를 얼마나 받았는지, 건강검진을 통해 평균적으로 어떤 건강상의 이상이 드러나는지 등을 알 수 있게 된다.

앞서 건강보험공단은 1차 심의 당시 △국민 이익 침해 가능성 △과학적 연구 기준 부합 여부 △자료제공 최소화 원칙 부합 여부 등을 따져 불허했다. 특히 데이터3법 통과에 따라 가공된 개인정보의 활용이 가능해졌지만 ‘과학적 연구’에 한정했는데 민간 보험회사의 연구는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그러자 한화생명은 ‘과학적 연구’ 등 부적합 사유 개선과 개인정보 보호 조치 등을 강조해 재심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생명 관계자는 26일 미디어오늘에 “한국 보험사들이 미국인 데이터를 쓰고 있는데, 한국에 맞는 데이터를 갖고 연구 학술 자료로도 쓰고 상품 개발에도 활용하기 위해 신청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간 보험업계는 공공의료 데이터가 있으면 고혈압, 당뇨 등 유병자 전용 상품 출시와 새로운 위험을 보장하는 상품 개발 등이 가능해 혜택이 커진다며 ‘공적 목적’을 강조해왔다.

개인정보 문제와 관련 한화생명 관계자는 “자꾸 밖에서 우려하는데 (한화생명이 요청한 정보는) 가명정보라서 개인식별이 절대 불가능하다. 개인이 식별될 정보를 달라고 할 수도 없다”며 “한 번도 안 가본 길이니 외부에서는 우려를 표하는 것 같다. 열심히 준비해서 신청을 다시 했다. 정보보호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노조 “‘가명정보’ 완벽하지 않아, 보험사 이익 위한 요구”

그러나 건강보험공단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익명정보가 아닌 가명정보는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가명정보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지우는 수준이기에 대조할 수 있는 다른 정보와 대조해보면 재식별(개인정보가 다시 드러나는 것)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연합뉴스.
▲국민건강보험공단. ⓒ연합뉴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개인식별을 할 수 없는 통계자료는 익명처리 정보라고 한다”며 “가명정보는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일부 정보만 제거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예를 들어 가명정보는 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한 데이터 속 이름, 주민등록번호, 지역, 연령, 생년월일, 언제 어느 병원에 방문했는지 등의 정보 중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지우는 식이다. 반면 통계정보는 국민 암 질환 현황 자료처럼 통계수치만 담겨있어 개인이 드러날 우려가 없다.

오병일 대표는 “가명정보는 건강보험공단의 원본 정보와 대조해보면 재식별이 가능하다. 재식별이 가능하면 완전한 익명정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한 뒤 “만일 가명정보에 나온 병원의 방문 기록을 입수해 대조해보면 (해당 진료기록이 누구의 것인지) 재식별이 가능해진다. 기업이나 범죄자 등이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 재식별을 위한 기술도 발전하고 있어 (개인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도록) 익명화하지 않는 한 위험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건강보험공단 노조 관계자 역시 “공단이 데이터를 민간보험사에 제공해야 한다고 보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며 “민간보험사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좋은 말을 써도 국민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절대 제공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간보험회사가 보험상품개발에 나서는 건 공익적 취지가 아니라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들 단체는 민간 보험회사의 정보 요구는 법이 허용한 ‘과학적 연구’에 포함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데이터3법 도입 당시 기업의 무분별한 개인정보 오남용 우려에 활용 기준을 ‘과학적 연구’로 못 박았다.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 ‘기업이 상품 수행을 위한 과학적 연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논쟁의 영역이 됐다.

앞서 참여연대, 진보넷, 국민건강보험노조 등 50여개 단체는 지난 19일 성명을 내고 “개인정보보호법 관련 조항의 취지는 해당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개인들도 암묵적으로 동의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라는 가정에 따른 것”이라며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공공성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용에 개인의 정보 자기결정권을 제약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 취지에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 보험회사 시민 건강정보 담긴 데이터 요구에 시민단체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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