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비극이 해소되는 날까지 현실적으로 이곳, 이땅의 궁극적 운명은 군의 어깨에 달려 있다. 어떤 논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오늘의 생존의 조건이고 상황이다”

1979년 12월30일 “격동의 70년대를 보낸다” 조선일보 사설 중 일부 내용이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부에 조선일보는 이렇게 화답했다.

전두환 군사 독재는 언론자유를 말살했다. ‘땡전뉴스’로 대표되는 전두환 찬양 보도는 폭압적 정권 하 언론의 생존법이 굴욕에 가까웠다는 걸 보여준다.

특히 전두환 정권과 조선일보의 관계는 각별했다. 손석춘 교수(건국대학교)는 자신의 저서 조선평전을 통해 “결국 전두환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백60여일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은 언론, 그 중에서도 통단사설로 전두환을 ‘새로운 길잡이’라 선동한 그(사주 방우영)가 단연 제일의 앞잡이”라고 비판했다.

▲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전두환과 조선일보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평가하는 건 전두환 정권 시기 ‘결탁’이라고 할 정도로 찬양에 가까운 보도를 내놓고, 언론통폐합 조치로 경쟁 매체가 쇠락의 길을 걸은 반면, 조선일보는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부터 언론통폐합 조치까지 관련한 조선일보 보도 내용을 발췌해 정리한다. (참고문헌 조선평전_손석춘 교수)

1980년 1월30일 일본 신문 산케이와의 회견에서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은 이렇게 말했다.

“언론규제는 없는 것이 낫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의 제약이 가해져도 하는 수 없는 상황이 있다. 4·19에서 5·16까지의 1년은 어떠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전혀 양립되어 있지를 않았다. 하룻밤새 모든 신문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서게 되고 1년 내내 연일 조석간을 통틀어 정부를 두들겨 팼다… 그 사태를 한국 언론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 5·16에 의해 언론규제를 받게 되자 이번에는 언론의 자유를 붙잡고 ‘슬픈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너무도 감성적인 처사이다”

손석춘 교수는 선우휘 주필의 발언을 “군부의 언론 통제를 정당화하는 감성적 망언이었다”며 “하지만 당시 모든 언론인이 선우휘 같지는 않았다. 경향신문과 한국일보 기자들은 언론 자유의 신장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꼬집었다.

당시 전두환의 국군보안사령부는 ‘K-공작계획’에 따라 언론사 간부의 성향을 파악하고 회유했으며 학자와 평론가의 기고를 조직해 우호적인 여론인양 조작했다.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확대한 1980년 5월17일부터 조선일보는 전두환 군부의 스피커를 자처했다. 5월22일 조선일보 1면 제목은 “광주 일원 소요 사태”였다. 다음날 23일 전두환 정권이 발표한대로 ‘김대중 씨 수사 중간발표’가 실렸다. 5월25일 1면 사진은 “총기 널린 폐허의 광주”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날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사회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격앙된 군중 속에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그런 증거가 포착되기도 했으며, 서울에서는 남파간첩이 체포되고 했다. 이들이 지역감정을 촉발시키는 등 갖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흉흉케 함으로써 사태를 격화시켰으니라는 것도 십분 짐작이 가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전두환에 맞선 동료 언론인에 대해서도 냉혹했다. 계엄사령부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언론인 8명을 연행해 조사 중이라고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정부와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 국가보위와 난국 타개에 정진하고 있는 이 때 확고한 시국관을 가지고 국민을 올바로 계도해야 할 언론인이 자신들의 신성한 사명과 책무를 망각하고 도리어 악성적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시켜 사회 민심을 자극 현혹시키는 행태를 계속하여왔다”라고 썼다.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라고 평가받는 보도도 이어졌다. 그해 8월9일 “미국이 전두환 장군을 지지할 것”이라는 AP통신 기사를 인용한 기사를 실었다.

전두환을 ‘새 시대를 영도할 지도인물로 국민적 기대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라고 쓴 8월12일자 1면 기사는 전두환과 조선일보의 특별한 관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지금도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코너로 운용 중인 ‘팔면봉’에서 당시 조선일보는 대통령 최규하 하야 발표(8월16일)가 있자 “정치일정 급속히 앞당겨질 듯, 새로 덮는 지붕 빠를수록 안도감”이라고 썼다.

전군 지휘관들이 전두환 대통령 추대를 결의하자 조선일보는 “국가보위의 주체인 군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새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소신을 천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인간 전두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선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이 듯하다”라고 썼다.

▲ 1980년 8월23일자 조선일보 3면
▲ 1980년 8월23일자 조선일보 3면

8월27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은 조선일보 사주 방우영을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28개 신문, 29개 방송, 7개 통신을 각각 14개, 3개, 1개로 언론통폐합 조치를 내렸다.

조선일보는 “이번 결정은 한국언론사상 일대 혁명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언론기관이 국민에게 각종 지식과 고도의 정보를 전달하는 등의 올바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왔으나 이런 과정에서 공익성 우선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뒤따르지 못하고, 지나치게 상업주의적 경향을 띠어왔다는 점이 그동안 크게 논란 되어왔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통폐합으로 신문시장에서 30여년간 1위였던 동아일보는 동아방송을 잃는 등 경쟁매체의 몰락이 시작됐는데 조선일보는 이를 언론개혁으로 포장한 것이다.

손석춘 교수는 “전두환의 뜻에 따라 언론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기자가 실직하는 ‘시장 상황’은 신문과 방송사로 하여금 전두환 찬양에 앞 다퉈 나서게 했다”며 “그 과정에서 전두환 군부가 가장 공이 컸다고 본 조선일보는 1980년대 내내 신문시장에서 고속 성장했다”고 지적했다.

손석춘 교수는 23일 통화에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사주 방우영이 참여했다. 사실상 5공화국은 권언복합체라 규정할 수 있고, 조선일보는 그 한 축으로 볼 수 있다”며 “박정희 정권 때까지 언론이 권력에 예속된 상태였다면 80년대에 언론은 정권에 일방 예속된 게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세력이었고, 그 결탁에 앞장섰던 게 조선일보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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