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와 대주주 TY홀딩스(태영그룹)가 빚은 무단협 사태가 벼랑 끝에 치달았다. 사측이 경영진 임명동의제를 무력화한 뒤 임원 인사를 채비하고, 노조활동 보장 중단을 선언했다. SBS 구성원들의 쟁의행위 투표도 임박했다. 첫 방송사 경영진 임명동의제 무력화 사태라는 상징성을 지닌 SBS의 현 상황에 일각에선 언론계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SBS는 지난 8일 언론노조 SBS본부에 다음달 1일부로 노동조합 활동 보장 중단을 통보했다. 올초 SBS가 노조 추천 사외이사·감사위원 임명을 거부한 뒤 지난 4월 단협 해지를 통고하고, 단체협약에 있는 임명동의제 폐지를 요구하며 지난달 3일 무단협 사태를 낳은 데 이은 노조 적대 정책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방송통신위원회의 SBS 재허가와 대주주 TY홀딩스-SBS미디어홀딩스 합병 승인 이후 한층 거세졌다.

언론노조 SBS본부가 무단협 사태가 지속되며 노동쟁의 조정 신청에 나섰지만 사측은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측은 조합원들의 쟁의행위에 대비해 비상근무 일정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BS본부는 TY홀딩스가 다음달 1일 SBS 사원 정기인사를 앞두고 이번 주 내로 SBS 사장을 포함한 임원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5일 서울 목동 SBS 사옥에 차려진 언론노조 SBS본부 농성장에 텐트가 세워져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15일 서울 목동 SBS 사옥에 차려진 언론노조 SBS본부 농성장에 텐트가 세워져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SBS본부가 조합원이 직접 목소리를 낼 결정적 시점으로 보는 한 이유다. 임명동의제가 힘을 잃은 상황에서 보도·제작·편성을 비롯한 방송 책임자를 일방적으로 채울 우려가 크다. 정형택 언론노조 SBS본부장은 이에 15일 SBS 사옥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대주주와 SBS는 단협상 임명동의제 조항 삭제를 요구한다. 임명동의제가 사측의 ‘선택지’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당초 임명동의제는 ‘타협’의 결과라는 게 노조 입장이다. 당시 SBS본부장이었던 윤창현 현 언론노조위원장은 “2017년 합의 당시 노조는 노조가 사장 후보를 제시하는 사장추천제를 제시했다. 이에 대주주는 ‘이사 임면권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했고 그 양보의 결과가 임명동의제”라고 지적했다.

세부 합의 과정에서도 대주주 사측은 임명 철회 조건을 노조가 제시한 ‘전사원 50% 반대’에서 ‘3분의2(66%)’로 설정하자고 요구했다. 노조는 60% 선에서 양보했고 박정훈 현 SBS 사장은 과거 간신히 선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사 첫 사장 임명동의제 도입 이후 곧바로 다른 방송사들이 영향을 받았다. 이후 KBS, MBC, YTN, EBS가 공정방송 책임자 임명동의제를 도입해 현재 실시하고 있다.

▲박정훈 SBS 사장(왼쪽)과 윤창현 전 언론노조 SBS본부장이 지난 2017년 10월13일 사장 임명동의제에 합의했다. 사진=SBS 제공
▲박정훈 SBS 사장(왼쪽)과 윤창현 전 언론노조 SBS본부장이 지난 2017년 10월13일 사장 임명동의제에 합의했다. 사진=SBS 제공

임명동의제 상징성에 방송계 우려 시선

SBS 무단협 사태는 이미 현장에서 언론사 대주주 사측과 노조에 신호로 작용하고 있다. KNN 부산민방의 경우 노사가 임명동의제와 중간평가 도입 여부를 논의하다 다음 단체협상으로 미뤘다. KNN 사측은 실무협상에서 노측에 ‘임명동의제는 아직 불안정한 제도 아니냐’고 의견을 전하면서 예시로 SBS의 무단협 사태를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철규 언론노조 KNN지부장은 “실무회담에서 사측이 ‘임명동의제가 좋지 않으니까 다른 방송사들도 파기하려 하는 것 아니냐 다음 번에 논의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회사가 SBS 사태를 계기로 일면 기세등등해진 면도 있다”며 “지역민방 가운데 명실상부 임명동의제를 도입한 곳은 없다. SBS 무단협 사태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다른 민방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언론노조 SBS본부 조합원 230명이 16일 서울 목동 SBS사옥에 모여 TY홀딩스-SBS의 무단협과 임명동의제 무력화를 규탄했다. 사진=SBS본부
▲언론노조 SBS본부 조합원 230명이 16일 서울 목동 SBS사옥에 모여 TY홀딩스-SBS의 무단협과 임명동의제 무력화를 규탄했다. 사진=SBS본부

호반건설이 최근 최대주주로 올라선 서울신문도 SBS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장형우 언론노조 서울신문지부장은 지난 12일 태영그룹 규탄 기자회견에서 “선행학습하는 기분이다. 호반건설은 서울신문을 가지려 KBC광주방송을 팔았고, 몇 년 전 태영의 SBS미디어홀딩스를 따라 ‘서울미디어홀딩스’를 만들었다”며 “무단협 사태가 얼마 뒤 서울신문의 일이 되지 않을까 참담하다”고 발언했다.

정형택 SBS본부장은 “지상파 언론사가 겪는 무단협 사태는 그 상징성이 크다. 조합원들이 임명동의제 파기를 막느냐 여부가 건설자본과 언론계 모두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정 본부장은 “‘건설자본이 지상파 방송사에도 저렇게 하는데 구성원과 시민사회와 정부가 내버려두는구나’ 신호를 주어선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후 다른 언론사와 대주주들이 하나씩 노동권과 공정한 방송·보도를 위한 장치를 빼기 시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질문은 ‘조합원들이 임명동의제 없는 SBS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가 됐다.

김수영 SBS 기자협회장은 16일 “우리는 왜 임명동의제를 지켜야 할까. 회사 주장처럼 굳이 (임명동의제)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봤다”며 “이 장치가 없을 때 우린 어땠나. 배경을 알지도 못하는 지시가 내려와 어딘가 현장으로 갔던 경험들이 있다.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한번 물러서면 되겠지 하는 순간 우리는 세 발, 네 발 물러서게 될 것”이라며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6일 ‘조합원 총결집의 날’에는 SBS본부 추산 230여명의 조합원과 연대자들이 이날 정오 서울 목동 SBS 사옥에 모였다. SBS본부는 오는 22~28일 쟁의행위 찬반 투표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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