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정감사에서 ‘왜 KBS는 오징어게임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 하느냐’던 한 국회의원의 질책은 국내 공영방송이 처한 현실을 국회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씁쓸한 웃음을 안겼다. 그저 웃고 넘기기엔 콘텐츠나 플랫폼으로서 경쟁력 모두 약화된 KBS 현실을 마냥 웃어 넘길 수 없던 탓이다.

“‘오징어게임’ 같은” 콘텐츠를 KBS에 요구할 수 없는 이유, 공영방송이 만들어야 할 콘텐츠의 방향에 대해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공론의 장을 가졌다. 한국방송학회가 28일 “우리 방송은 왜 ‘오징어게임’ 못 만드나:그 오해와 진실”을 주제로 마련한 토크 콘서트에서다.

강신규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연구위원은 “최근 웹툰·웹소설 트렌드가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이라며 “과거 많은 이야기들이 성장 서사를 다뤘다면 최근엔 ‘이번 생은 망하고’(이·생·망) 다른 생, 일종의 게임에 참여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오징어게임’도 그런 맥락에서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봤다. 거액의 상금을 걸고 펼쳐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줄다리기’ 등의 게임은 한국적이면서도 쉽고 단순해 문화적 이질감을 최소화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방송학회가 28일 진행한 “우리 방송은 왜 ‘오징어게임’ 못 만드나: 그 오해와 진실” 토크콘서트 유튜브 생중계 갈무리
▲한국방송학회가 28일 진행한 “우리 방송은 왜 ‘오징어게임’ 못 만드나: 그 오해와 진실” 토크콘서트 유튜브 생중계 갈무리

동화적 연출이 데스게임의 잔혹함을 상쇄한 점도 성공 비결로 꼽힌다. 실제로 ‘오징어게임’ 제작진은 “그 어떤 곳에도 없는 비주얼”을 목표로 삼았고, 넷플릭스는 ‘압도적인 비주얼’ ‘독보적인 비주얼’을 내세워 콘텐츠를 홍보해왔다. 

이선민 시청자미디어재단 연구위원은 이를 기존 데스게임류 콘텐츠와 비교했다. “일본 만화 ‘도박의 묵시록 카이지’는 그림체의 비호감이 있는데 ‘오징어게임’은 사람을 죽이는 걸 산뜻한 느낌의 동화적 세트·의상으로 상쇄했다”며 “카이지가 저변에 깔린 인간의 추악함이나 본성에 질문을 던지는 반면 오징어게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울러 “역시 ‘넷플릭스’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면서 대규모 투자와 글로벌 플랫폼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심의·예산의 한계…KBS가 만들어야 할 콘텐츠는

이런 진단을 모아보면 KBS가 ‘오징어게임’ 같은 콘텐츠를 만들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김희경 성균관대 학술교수는 “국정감사에서, 그것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이 ‘왜 KBS는 오징어게임을 못 만드나’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건지 모르겠지만 지상파 방송이 직면한 너무나 답답한 심의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지상파 방송사에 적용되는 잣대를 고려하면 ‘오징어게임’ 같은 장르의 콘텐츠는 제작·방영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공영방송에 대한 기대가 이중적”이라 꼬집었다. “공영적 역할을 하라는 목소리 반대편에 BBC처럼 글로벌 스튜디오를 차리라는 요구도 있다”며 “그걸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 예산, 제도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KBS에 요구할 콘텐츠적 책무가 뭔지 공영방송을 어떤 위치로 만들지 사회적 합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Netflix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Netflix

넷플릭스와 KBS의 지향점은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다. 강신규 연구위원은 지난해 7월 영국 방송통신규제기관 오프콤(Ofcom) 설문조사에서 시청자들이 뽑은 가치 있는 미디어서비스로 넷플릭스가 1위, BBC가 2위로 나타난 결과를 예로 들었다. 강 연구위원은 “BBC를 선택한 이유는 ‘차별적인 콘텐츠’, 대체로 보도 프로그램이었고 넷플릭스를 선택한 이유는 ‘다양성’이었다”며 “사람들에게 여러 가치를 제공해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것이 KBS 콘텐츠의 방향”이라 조언했다.

“넷플릭스가 ‘오징어게임’ 같은 베스트셀러를 만든다면 KBS는 ‘스테디셀러’의 질을 어떻게 높여갈지 고민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강수지 언론인권센터 활동가는 “과거 종편, tvN 같은 채널이 생길 때에도 왜 지상파는 저런 드라마 못 만드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게 넷플릭스로 넘어온 것 같다”며 ‘공영방송이 잘 해왔던 것을 더 잘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예컨대 주말·일일드라마 질을 높이고 다큐멘터리 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희경 교수 역시 “40~50년 전 정형화된 여성·남성상과 스테레오타입이 집약돼 공영방송 드라마에 나온다”며 “동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면서 품격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KBS 공영미디어연구소 소속 최선욱 박사는 “주말 드라마가 대략의 드라마 시청률로만 보면 늘 ‘탑’일 거다. 뻔한 포맷에 뻔한 스테레오타입을 기대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며 제작 현장의 고민을 전했다. 예산의 절대적 한계도 존재한다. 최 박사는 “미니시리즈 16부 제작 예산은 70억원 내외”(9회분의 ‘오징어게임’ 제작비는 253억원가량으로 전해졌다)라며 “방송은 싸게 많이, 영화는 고급스럽게 찍는 사이를 OTT 콘텐츠가 가로질러 가고 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Netflix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Netflix

이어 최 박사는 “결국은 지금처럼 파편화된 사회에서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며 “이런 점에 착안해 기획하면 드라마타이징이 되고 어떤 경우 다큐가 될 텐데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징어게임’ 성공에 ‘혐오’ 논의 가려져선 안 돼

이날 토크콘서트에선 ‘오징어게임’ 신드롬에 폭력성·선정성 논의가 가려져선 안 된다는 이야기도 이뤄졌다. 이선민 연구위원은 “처음 ‘오징어게임’이 나왔을 땐 혐오 맥락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느 순간 해외에서 주목 받았단 말 한 마디로 평정된 상황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일레로 ‘한미녀’란 캐릭터가 “여성의 몸을 대하는 방식이나 자신의 성을 교환하는 방식은 다분히 여성혐오적”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여러 징후가 정상적이진 않다. ‘K콘텐츠’라는 이른바 ‘국뽕’ 담론에 취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비판했다.

‘오징어게임’의 폭력성이 두드러지면서 오히려 수많은 혐오들이 가려졌다는 시각도 있다. 강수지 활동가는 이런 지적과 함께 미디어 전반에 미치는 ‘오징어게임’의 파급력과 영향력이 큼에도 이런 지점을 다루는 매체가 많지 않다 진단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 제작기 영상의 한 장면 ⓒNetflix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게임' 제작기 영상의 한 장면 ⓒNetflix

이성민 교수는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의 다른 콘텐츠들에 비해 대단히 잔인하고 선정적인 작품은 아니다”라면서도 “성공한 콘텐츠가 되면 공론의 장이 닫히는 건 문제”라 말했다. “한국 영화 등이 여성을 대해왔던 관습이 분명 남아 있고, 의도와 상관 없이 어떤 불편함을 만들었는지 합의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콘텐츠가 해외로 나가면서 수많은 시선들을 만날 것이다. 다양성에 대해 세밀하게 논의해야 할 시작점”이라 강조했다.

이날 토크콘서트를 유튜브 생중계로 시청한 이들이 남긴 댓글도 여러 시사점을 남겼다. 한 시청자는 “우리나라 제작 환경에 대한 자기반성이 중요하다. 토론에 독립제작사나 편성 실무 담당자들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고 밝혔다. 창작자들이 지적재산권과 부가수익을 포기하면서도 넷플릭스를 찾는 이유를 다층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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