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 논란으로 국내 배구 리그에서 사실상 퇴출당한 배구선수 이재영, 이다영이 그리스 리그에 합류하기 위해 출국했다. 한 발짝도 걸어 나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취재진이 자매를 에워쌌고, 둘은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앞서 쌍둥이 자매는 “피해자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며 평생 사죄하고 반성하겠다고 했다가, 학교 폭력을 인정한 지 두 달 만에 피해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조용히 출국한 선수들이 또 있다. 2021-2022 국제빙상경기연맹 쇼트트랙 월드컵 1차 대회가 열리는 중국 베이징으로 떠난 쇼트트랙 대표팀이다. 2018 평창 올림픽 당시 동료 최민정 선수와 고의 충돌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심석희 선수가 빠졌다. 고의충돌 의혹은 심석희의 메신저 대화 내용이 폭로되면서 불거졌는데, 문제의 대화 내용은 심석희를 3년여간 성추행,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조재범 전 코치 측에서 2심 선고를 앞두고 공개했다. 고의충돌 사실 여부는 지난주 꾸려진 조사위원회에서 규명될 예정이다. 

여기까지가 이재영, 이다영 쌍둥이 자매와 심석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알아야 하는 전부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지나치게 많이 알려주고, 도를 넘어 분노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쌍둥이 자매의 출국 기사를 다룬 기사들 제목 상당수가 출국장에서 자매를 엄호하며 “고개 들라”라고 외친 모친에 초점이 맞춰졌다. 방송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콘텐츠는 말할 것도 없다. 이걸 정확히 의도했다 싶을 정도로 여지없이, 달린 댓글 대부분이 쌍둥이 자매와 엮어 그의 모친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쌍둥이 자매들의 사생활도 무차별적으로 보도됐다. 

이다영이 이혼 소송 중이며, 트로트 가수 임영웅에게 SNS로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다는 사실이 대중이 응당 알아야 하는 사안일까. 그는 더 이상 대중의 인기를 전제로 하는 프로 리그에 소속된 선수조차 아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심석희 선수를 둘러싼 논란은 시작부터 한참 도를 벗어났다. 한 매체에서 조 전 코치 측이 법원에 제출한 변호사 의견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피해자의 사생활이 여지없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심석희의 언행이 우리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그것이 국가대표로서의 자질에 모자라는 것이었다고 한들, 성범죄 피해자의 사생활을 드러내는 결정이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됐다. 

이후 조 전 코치가 빙상연맹에 보낸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거의 모든 미디어가 이 사안을 보도했는데, 그러면서 문제의 본질이 더 흐려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고의충돌’ 여부인지, 확정되지도 않은 조 전 코치의 무고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조 전 코치의 혐의는 만 17세에 불과했던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일이었다는 걸 상기시켜야 했다. 

나는 학교 폭력 논란의 쌍둥이 자매와 고의충돌 의혹을 받는 심석희 선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집된 분노에 동참해 이들을 짓밟아버리고 싶지도 않다. 이들이 그 모든 텍스트를 다 읽고도 꿋꿋이 지낸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나쁜 선택을 하면 그땐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마음 깊이 우려스럽다. 

내가 접하고, 전하는 기사들은 무엇으로 쓰인 걸까. 오래전 꿈꿨던 것처럼 예리한 촉을 가진 멋들어진 펜일까, 아님 바짝 날이 선 검(劍)일까. 검(劍)으로 쓰인 리포트는 사람들에게 닿을 때마다 더 아슬하게 갈려 치명적 흉기로 거듭난다.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숨통 끊어버리는 일에 나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이런 서늘함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