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특파원 출신의 조선일보 중견기자가 조선일보 변화의 가장 중요한 점은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라고 지적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3년간 베이징특파원으로 있다가 최근 본사로 복귀한 조선일보 산업부의 여시동 기자는 지난 30일 발행된 조선노보에 기고한 <'새 치즈'를 찾아 떠나자>는 글에서 "신문업계도 이제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그 발단이 정권 교체에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언론환경이 급격히 변하는 것은 분명 새시대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 조선노보 703호 30일자 1면
여 기자는 "변화가 반드시 발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변화없는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며 "더 나아가 요즘 각박한 신문업계에는 '변화없이' 생존없다는 논리가 가능한 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자사 변화에 대해 여 기자는 "사람들은 변화의 방향과 콘텐츠가 문제라고 한다"며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여 기자는 "한국 신문업계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내용처럼 우리는 그동안 갖고 있던 치즈를 거의 다 먹어치웠다. 우리 옆에 새로운 치즈는 더 이상 없다. 새 치즈는 신발 끈을 동여매고 길을 떠나는 사람만이 찾아 낼 수 있다"며 "조선일보도 마찬가지다. 새 치즈를 떠나자는 사람들의 열망이 넘쳐날 때 치즈는 반드시 발견된다. 치즈를 찾아 떠나자"라고 글을 맺었다.

다음은 여 기자의 노보기고문 전문.

'새 치즈'를 찾아 떠나자

베이징(北京) 생활 3년은 제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기간이었습니다.베이징에서 서울로 날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서 무엇을 한 건지, 중국 생활은 제게 무슨 의미인지, 앞으로 한국 생활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본사 발령이 난 뒤 나름대로 중국생활을 차분히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환송회다 뭐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보니 미처 마무리 못한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베이징 3년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뒤늦게 돌이켜 봅니다. 베이징 생활은 제게 새로운 경험들을 안겨주었습니다. 가자마자 터진 장길수군 일가족의 베이징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진입 사건을 필두로 탈북자들의 외국 공관 진입사건이 러시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어디 어디에 몇 명이 들어갔다는 소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경찰기자 생활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저로서는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었습니다.

이후 신의주특구 사건과 베이징 북핵회담, 김정일 방중, 용천 폭발사고까지 대형 사건들이 심심하면 터져 나왔습니다. 중국 지도부 개편 등 중국 자체 사건들도 적지 않았지만 한국 특파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대부분 북한 관련 사건들이었습니다. 특파원들은 가끔 자조적인 어조로 “우리가 중국 담당 특파원인지 북한 담당 특파원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베이징 특파원들은 탈북자들이 걸어오는 전화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걸어오면 특파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게 됩니다. 도청을 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도청 때문에 특파원들이 비서나 아내, 친구의 휴대폰을 번갈아 빌리는 곳은 아마 중국 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중국 공안 10여명의 ‘심야 방문’을 받은 저로서는 더욱 예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 서울에 발을 디뎠을 때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것 같았습니다. 터널 안에 있을 때는 그곳이 터널인줄 몰랐지만 터널을 벗어나고서야 그곳이 터널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나온 터널은 자본주의 벽돌로 쌓아올려졌으면서도 사회주의 문패를 단 그로테스크한 터널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잘 모르겠습니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제가 떠날 때보다 훨씬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정치판이 바뀌니 경제도 사회도 정신없이 바뀌는 듯 합니다. 정치를 따라 뭇사람들의 생각이 이리저리 춤을 추고, 나라 전체가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는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할 지 모르겠습니다.회사 생활도 부서가 바뀌는 바람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누군가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해져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아닌 ‘생존’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 마뜩찮지만, 부서 이동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과 익숙해질 수 있는 또다른 기회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신문업계도 이제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발단이 정권 교체에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언론환경이 급격히 변하는 것은 분명 새시대의 흐름입니다.

변화가 반드시 발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변화없는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요즘 각박한 신문업계에는 ‘변화없이 생존없다’는 논리가 가능한 지도 모르겠습니다.사람들은 변화의 방향과 콘텐츠가 문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수년 전 중국의 한 지방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도시의 시정부는 한창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비효율로 유명한 중국 공직사회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치자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의 한 방법은 시청 부서들을 통째로 민영화하는 것이었습니다.예컨대 도로국이나 수도국을 민간회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부처에서 일하던 공무원들은 하루 아침에 공무원에서 민간회사 직원으로 신분이 바뀝니다. 해당 공무원들은 신분 제약을 벗어나 마음놓고 돈벌이 할 수 있게 됐다며 오히려 변화를 반겼습니다.

체질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알고 있던 중국 사람들의 놀라운 변화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울시 도로국이 하루 아침에 서울도로주식회사로 바뀐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중국 전역에는 갖가지 실험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방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실험들은 불안정하고 무질서해 보이며 더러 참담한 실패로 끝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화와 발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자세가 없다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지금처럼 전개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 신문업계에 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내용처럼 우리는 그동안 갖고 있던 치즈를 거의 다 먹어치웠습니다. 우리 옆에 새로운 치즈는 더이상 없습니다. 새 치즈는 신발 끈을 동여매고 길을 떠나는 사람만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치즈를 찾아 떠나자는 사람들의 열망이 넘쳐날 때 치즈는 반드시 발견됩니다. 치즈를 찾아 떠납시다.

여시동·조선일보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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