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선일씨 피살 사건과 관련, 정부가 성급한 파병재확인 방침을 언론에 발표해 결과적으로 피살에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 언론계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1일 새벽 5시 ‘한국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김씨를 살해하겠다’는 협박이 담긴 비디오를 알자지라 방송이 방영하자 오전 8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회를 열고, “파병방침은 불변”이라는 회의결과를 오전 10시 내외신 합동 브리핑 형식으로 언론에 발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이라크 현지에서는 연합뉴스측에 이 내용을 영문판 기사로 처리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시간도 채 안돼 한국발 ‘파병방침’ 뉴스가 전세계로 타전됐다. 김씨는 23일 새벽 1시55분 테러단체에 의해 피살됐다.

‘파병방침 재확인’ 발표가 좀 더 늦춰졌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 내용은 한국의 언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돼 테러단체가 있는 아랍지역에까지 전달됐다. 이에 대해 이헌재 국무총리대행은 지난 24일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일본에서도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대응을 했다”며 “일본인 납치 사건의 경우에 고이즈미 총리가 ‘파병원칙에 변함없으며 테러에는 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외교통상부 서정인 공보과장은 29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떻게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국정조사나 감사원 감사에서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중앙일간지 정치부장은 “정부가 파병방침을 재확인했더라도 협상을 위해 좀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있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한 B외신사 중견기자도 “정부의 파병방침 발표보다는 김씨에 대해 목숨을 보전해달라는 요청이 선행됐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AP통신이 김씨가 납치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훨씬 전에 납치 장면이 담긴 테이프를 입수하고도 김씨 사망 이후에야 이를 공개한 데 대해 취재윤리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A외신사 중견기자는 “테이프를 갖고 있었지만 취재과정에서 외교부가 부인했다고 끝내기보다는 보다 책임있는 정부 관계자에게 적극적으로 문의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B외신사 중견기자도 “실제로 인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점도 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AP통신측은 “테이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이 없었고, 외교부 관계자도 모르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AP통신이 김씨의 피랍 여부에 대해 외교통상부에 문의했음에도 외교부가 확인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외교부는 당초 전화받은 직원이 없다고 했다가 뒤늦게 5명의 직원이 AP 기자와 통화했음을 인정했다. 외교부는 그 뒤에도 AP쪽에 잘못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외교부 서정인 공보과장은 “AP 기자와 통화한 5명 중 ‘김선일’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공보관실 직원 한 명뿐”이라며 “책임자도 아닌 직원에게 짧고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고 AP가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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