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사는 1999년 7월26일 김주언 언론재단 이사와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을 상대로 각 1억원씩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2004년 6월16일 이를 기각했다. 사진은 1999년 7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부장판사 김상균)가 16일 김주언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와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에 대한 조선일보의 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가 이 같이 선고한 것은 조선일보 보도가 오보라는 의혹 제기의 광범위한 공익성과 상당성이 실제 오보 여부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이승복의 형인) 이학관의 증언 내용이 뚜렷하고 다른 증인들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해 주는 이상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강인원과 노형옥(사진기자)이 이승복 사건의 현장 취재를 한 것은 사실로 인정돼야 할 것"이라면서도 "언론·표현의 자유에 의해 용인되는 범위 내의 '있을 수 있는' 의혹제기라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복 사건이 의혹조차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고, 설령 이승복 사건의 실체 및 그 성격을 희석시키기 위해 의혹을 제기했다 해도 △언론 표현의 자유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확립 정도 △그 정도의 의혹제기나 비판을 허용하지 못하거나 그 비판에 흔들릴 만큼 취약하지 않은 언론기관 등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의혹보도를 할 수 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이승복 사건은 공적 영역에 관한 것"

재판부는 또한 판결문에서 '공익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당시 시대 상황 하에서 발생한 북한 무장공비 일가족 학살사건의 피해자 이승복은 수십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반공사상의 상징 인물로 지칭돼왔고, 어린 9세의 산골 소년이 자신의 집에 침입한 무장공비들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무장공비들에 의해 입이 찢겨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에 보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반공사상 형성을 위한 상징물처럼 돼온 것이 사실"이라며 "이승복 사건은 분단국가의 구성원인 우리 국민 대다수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므로 우선 그 점에서 피고들의 주장은 객관적으로 볼 때 공공의 이익 내지 공적 영역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발언했다고 유일하게 보도했던 조선일보 1968년 12월11일자 기사.
재판부는 이어 "9세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 총칼을 든 잔인한 무장공비들이 침입한 상황에서 과연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사건 당시 조선일보를 제외한 다른 신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은 당시 조선일보 소속 기자 등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까지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승복 기사에 대해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경직된 반공 이데올로기의 완화를 도모하려는 피고들의 의도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점을 비춰볼 때 전시회 개최나 의혹 보도가 특별히 조선일보를 폄하·모욕하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승복 사건의 역사적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어"

한편, 이승복 보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인정했던 형사재판 결과를 뒤집지는 않았다. 조선일보 기자가 사건 현장에 있었고, 이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또는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 관계자는 이날 미디어오늘 기자에게 "이승복 사건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며 진위 여부에 대한 단정은 내리려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명예훼손 사건과 다르지 않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판결했을 뿐"이라는 이 관계자는 "사회적 공론화를 할 수 있고, 피고 등이 조선일보의 보도경위에 대한 의혹 제기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게 이 판결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피고측 변호인인 김형태 변호사는 "조선일보가 항소해 사건의 진위를 분명하게 밝혔으면 한다"고 말했으며, 조선일보는 "항소를 적극 검토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복 사건 자체가 민감하고 부담스런 주제"

이승복 보도의 진위 여부를 제쳐두고라도 형사재판 결과와 달리 원고 청구를 기각하기까지 재판부는 적잖은 부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 관계자는 "부담이 많았다"며 "사안이 일반 사건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사건 자체가 이승복에 대한 것이어서 민감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같은 법원 안에서) 형사재판과 다르게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제기도 있을 수 있으나 민사는 민사대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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