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비단길)는 바로 나에게 돌아가는 여행이다. 그 길에는 역사와 인생 그리고 낭만이 있다. 실크로드는 짧은 여행이라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깊은 추억을 남긴다. 실크로드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한다.

둔황, 실크로드 통한 동서교역의 요충지 역할

   
▲ 중국내 실크로드(비단길) 여행은 바로 나에게 돌아가는 여행이다. 그 길에는 역사와 인생 그리고 낭만이 있다.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 등 실크로드의 황량한 황무지와 사막길은 일생동안 잊지못할 강한 인상을 남긴다.
중국내 실크로드는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옛 장안)에서 시작해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 둔황(敦惶)과 신장(新疆) 자치구 투루판(吐魯蕃), 우루무치(烏魯木齊)로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창안(長安)’은 한(漢), 당(唐)나라의 수도로 당시 비단 등 중국 상품들의 집산지로 각 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벽안의 외국 상인들은 상아 등 특산품을 가져와 팔고 중국에서 생사와 비단, 자기 등을 구입한 뒤 본국으로 행렬을 이뤄 되돌아갔다. 당시 이용한 길은 란저우-우웨이(武威)-허시저우랑(河西走廊)-둔황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둔황은 당시 동서교역의 요충지 구실을 했다. 실크로드는 쿤룬산 북쪽을 거쳐 현재의 이란과 인도양으로 빠지는 남로(南道)와 톈산(天山) 남쪽을 따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북로(北道)가 있었다. 이후 톈산북로를 거쳐 지중해 각 국으로 이어지는 신북로(新北道)가 만들어졌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쉬안짱(玄壯+大) 법사와 이탈리아의 마르코폴로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넘나든 길이기도 하다.

실크로드가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풍경이 삭막한 사막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름은 녹색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비단길은 여름에도 누런 황토색이다. 온통 보이는 것은 황량한 모래 벌판과 흙먼지 날리는 바람뿐이다. 황량한 황무지와 사막은 풍요로움에 길들여진 인간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린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2000년 7월 서부대개발 취재차 란저우에 첫발을 디딜 때였다. 당시 공항 도착을 앞두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비친 란저우 일대는 온통 싯누런 황무지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연결되는 도로 양옆도 온통 누런 흙 무더기였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는 황토색 위에 푸르스름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는 란저우 일대의 강수량이 연간 180㎜에 불과한 상태에서 풀 씨가 싹을 틔우다 시들기를 반복한 때문이라 한다. 란저우는 실크로드상에 위치한 첫 번째 오아시스로 한복판에 황허(黃河)가 흐른다. 란저우는 황허의 시발점이다. 황허의 물색은 시뻘건 황톳빛 색깔을 띤다. 손으로 만진 뒤 물기가 마르면 가는 먼지가 남을 정도로 농도가 진하다. 황허가 왜 탁류인지 란저우 일대의 황무지를 보면 이해가 된다.

사막이 있기에 실크로드 존재…란저우 황허(黃河)의 시발점

   
▲ 둔황(敦惶)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밍사산(鳴沙山)은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며 끊임없이 소리내 운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밍사산을 바라보는 보는 순간 우리는 최면에 걸린듯 할말을 잊는다.
물이 사막의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흙탕물 색깔을 띠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상인들은 낙타에 의존해 사막을 가로지른 뒤 란저우에 여장을 풀고 시안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상인들이 란저우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크로드가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크로드는 샘이 솟는 오아시스라는 ‘점’들의 연결이다. 여름이면 산과 들에 녹음이 우거지고 전국토의 70%가 산으로 계곡마다 물이 넘치는 우리의 환경과 너무도 다르다. 실크로드의 여정에서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둔황은 실크로드상에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다. 사막의 한가운데 위치해있으나 물이 넘친다.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떠나기 전 쉬어 가는 집결지였다. 이곳은 바람이 빚어낸 아름다운 사막 예술품의 극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둔황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밍사산(鳴沙山)이 있다.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며 끊임없이 소리내 운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밍사산을 바라보는 보는 순간 우리는 최면에 걸린다. 마치 하늘의 천사들이 가는 모래를 뿌린 듯 모랫더미가 차분하다. 바람이 깎아 낸 모래의 곡선은 조선 여성의 저고리 소매 깃을 연상시킨다. 놀라운 것은 끊임없는 바람 속에서도 수 천년동안 날렵한 모래 곡선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막의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여성의 머릿결을 쓰다듬듯 모래를 끊임없이 쓸어 올리고 또 쓸어 올린다. 사람들이 밍사산에서 썰매를 타고 ‘모래 지치기’를 해도 밍사산은 단아한 자세를 절대 놓지 않는다. 밍사산의 바람은 강하다. 산등성이에 올라 경사진 모래 언덕에 서면 세찬 바람이 중심을 연거푸 무너뜨린다. 가없는 사막의 파랑을 바라보며 캔맥주 한잔을 마셔도 괜찮다. 밍사산 정상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사막은 우리에게 ‘인생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밍사산’(鳴沙山)의 바람소리·‘모가오쿠’(莫高窟)의 불교 유적 ‘환상’

   
▲ 간쑤(甘肅)성 둔황(敦惶)석굴 ‘모가오쿠’(莫高窟)는 사막에 핀 ‘불교 문화의 꽃’이다. 모가오쿠의 정면에는 높이 35.5m로 가장높은 미륵불이 안치된 96굴이 있다.
   
▲ 둔황 벽화는 역사와 풍속·의복·건축·음악·무용 등 온갖 문화가 녹아 있는 ‘벽 위의 도서관’이 됐다. 둔황(敦惶)석굴 ‘모가오쿠’(莫高窟) 45굴의 보살상으로 표정과 옷주름이 정교하며 높은 예술적인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밍사산의 바로 아래에는 물이 가득 찬 ‘초생달’이 누워있다. 이름도 ‘위에야취안’(月牙泉)이다. 이 샘은 수 천년동안 사막 한 가운데서 한번도 물이 마르지 않은 전설을 머금고 있다. 주변의 풀과 나무들도 바람과 속삭인다. 밍사산에 고즈넉한 밤이 오면 ‘위에야취안’은 쏟아지는 달빛 속에 고요히 잠든다. 돈이 넘치는 곳에 문화가 발달한다. 둔황도 예외가 아니다. 밍사산의 동쪽방향으로 25㎞ 떨어진 곳에 ‘모가오쿠’(莫高窟)가 있다. 둔황은 한창 융성하던 때에 우체국과 여관, 시장이 들어선 교역의 최대 중심지였다.  ‘모가오쿠’는 사막에 핀 ‘불교 문화의 꽃’이다. 둔황은 서기 366년 16국 시대부터 14세기 원대(元代)까지 1천여년 동안 동서교역의 중심지였다. 둔황을 거치는 고위 관료나 부호들이 이곳에 돈을 내 복을 비는 불교사원을 세웠다. 막고굴은 1600여 년 전인 서기 366년(前秦의 建元 2년) 러쭌(樂재방변+尊)이라는 화상이 밍사산에서 금빛을 발견하고 평생의 수행처로 굴 하나를 연 것이 시초였다. 이후 원까지 남북으로 1600m에 이르는 절벽에 굴을 파고 그 안에 소상(塑像)과 벽화를 새기기 시작했다. 이곳의 소상은 주변 흙을 짚과 이기고 팔뚝과 다리에는 나무 심을 박아 만들었다. 모가오쿠는 198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해졌다.

   
▲ ‘모가오쿠’(莫高窟) 112굴에는 불심(佛心)으로 흥에 겨운 여인이 비파를 머리 뒤로 들어 켜는 ‘반탄비파’(反彈琵琶·112굴)상이 있다. ‘반탄비파’는 둔황 중심가에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둔황의 상징물이다.
석굴은 한때 1000여 굴에 달했으나 지금은 492개의 굴밖에 남지 않았다. 수(隨)나라 이전이 120개, 수나라 140개, 당나라 111개, 오(五)나라 7개, 송과 원나라 것이 35개이다. 이곳에서 수습된 소상은 2415개, 벽화는 4만5천여 점에 이른다. 둔황 벽화는 역사와 풍속·의복·건축·음악·무용 등 온갖 문화가 녹아 있는 ‘벽 위의 도서관’이 됐다. 벽화 속에는 중국과 교류한 삼국시대 한반도 사신 및 흑인과 백인, 당나라 때 멜빵바지와 반바지를 입은 어린이, 흥에 겨운 여인이 비파를 머리 뒤로 들어 켜는 반탄비파(反彈琵琶·112굴)상, ‘둔황의 비너스’(57굴), 열반불(158굴) 등 ‘예술성의 극치’가 표현돼 있다. 북대굴의 높이 35.5m 미륵불 등 흙에 찹쌀 죽을 섞어 만든 채색 흙 조각은 세계에서 독보적이다.

하이라이트는 ‘짱징둥’(藏經洞)이라 불리는 17굴로 송나라까지의 경전과 문서 등을 보관했다. 이 문서 더미 속에서 신라인 혜초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됐다. 335굴은 신라인이 사신으로 온 모습이 그려져 있다. 148굴은 어둠 속에 16m 와불(臥佛) 위의 천장의 무늬가 완벽하게 남아있다. 427굴은 1922년에 진주한 러시아군이 금박을 긁어가 벽이 흉한 모양으로 남아있다. 

모가오쿠 유물 1900년 공개 이후 도굴꾼들 손에 유린…서용씨 ‘둔황 전문가’

그러나 모가오쿠는 ‘도난’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00년 공개되면서 영국, 미국 등 도굴꾼들의 검은 손들이 사정없이 이곳을 유린했다. 일제 침략자도 이곳을 거쳐갔다. 국내는 서용(42)씨가 ‘둔황 전문가’로 꼽힌다.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중국 유학 1세대인 그는 1997년 3월부터 둔황 모가오쿠에서 7년 동안 벽화예술을 연구한 뒤 2003년 12월 베이징에서 둔황 벽화 50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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