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보름여 남겨둔 상황에서 언론사들의 이번 총선보도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선거 쟁점의 상실이라는 점이라는 게 언론계 현업자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지난달 12일부터 보름간 정국과 전국을 뒤덮었던 탄핵열풍이 모든 현안을 다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일부 언론사들이 ‘북풍’ ‘총풍’ 등 정치권에서 불거진 이슈를 지면에서 확대 재생산하며 여론을 이끌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언론사들이 전혀 선거판세를 이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언론들 총선 쟁점 생산 못해”= 중앙일보 편집국의 한 중견기자는 “이번 총선에서는 언론이 선거를 이끌어가기에 벅찬 상황이 벌어졌다”며 “탄핵이라는 정치적 빅뱅이 블랙홀처럼 모든 현안을 빨아먹고 있는 특이한 정치현상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이 기자는 “지난 92년 대선 때는 ‘초원복집 사건’, 96년 총선에서는 ‘총풍’(판문점 총격사건), 97년 대선 땐 ‘북풍’, 2000년 총선 때는 남북정상회담, 지난 2002년에는 ‘정몽준 지지철회’ 라는 큰 변수가 선거의 쟁점으로 부상했다”며 “이들 변수의 배경에는 (사건을 터뜨린) 공작 또는 주도세력이 있었고, 언론이 이들 사안에 대한 판단 근거를 제시하며 여론을 어느 정도 이끌고 갔지만 이번 ‘탄핵풍’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촉발했지만 바람은 국민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언론이 대세를 거스르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편집국 간부도 “탄핵이라는 엄청난 변수가 다른 모든 것을 다 사장시켰다”고 말했다. 실제로 총선을 보름 앞으로 남겨둔 상태에서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언론사들은 선거판세를 좌우할 쟁점이나 화두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선거 화두와 쟁점의 진원지 역할을 해온 각 정당이 전 국민의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도 언론의 의제설정력을 약화시킨 주요 원인이라는 게 언론계 안팎의 분석이다.

▷“이번 총선은 정권권과 의회 심판” = 중앙일보 기자는 “그동안 총선보도의 핵심은 정권에 대한 중간심판의 의미를 띄었는데 이번에는 탄핵이 빚어낸 후폭풍으로 정권비판이 사라지고 오히려 노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과 거대야당에 대한 심판 쪽에 초점이 맞춰지는 사상초유의 흐름이 형성됐다”며 “이같은 흐름에 언론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는 이번 선거의 시대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정책과 후보의 인물 검증 보도가 실종되고 중앙당의 내부 문제에만 관심을 쏟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동아일보 간부는 “국회의원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헌법기관인데 아직도 제대로 된 후보 검증을 못하고 있다”며 “한국 정치의 양념이었던 정책기사도 완전히 맥을 못추고 있다”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의 중견 기자도 “인물검증이 중요한 데도 아직 전혀 손도 못 대고 있는 상황”이라며 “선관위에 후보등록이 끝나면 늦게라도 철저히 분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거여 견제론’ 먹히나 = 최근 한나라당에서 제기하고 있는 ‘거여 견제론’이 남은 선거 기간 중 어떤 영향을 줄지도 관심사다. 동아일보 간부는 “방송 등이 탄핵보도에 비중을 두면서 거여 견제론이 아직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며 “하지만 탄핵정국이 식어가면서 서서히 거여 견제론이 먹혀들고 있다는 얘기가 정치권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현호·김종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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