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가 5일 창간 84주년을 맞은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조선일보 규탄대회를 연 가운데 조선일보 내부에서도 자사의 보수적 지면과 의사소통 부재 등 을 지적하는 강도높은 비판의 목소리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조선일보 국제부의 전병근 기자는 5일 발행된 노보에 <“‘임금님 귀는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지난달 27일자 노보에 실렸던 <'새로운 보수'의 중심에 서자>라는 글을 반박한 형식의 이 기고에서 전 기자는  “보수이념 전파 의욕이 오히려 독자들로부터 반감을 샀다”며 “나라의 중심에 서자는 주장은 과잉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전 기자는 “진작부터 ‘임금님은 벌거숭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 침몰하는 어느 당 얘기도 아니고, 거창한 보수위기론도 아니다. 내 젊은 꿈이 터잡은 곳의 이야기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새 보수이념을 만들어 전파하고 민족의 중심에 서자’는 주장에 대해 “지면에는 비전과 이념과 의욕이 넘쳐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는가”라고 반문하며 “작금의 영향력 실추가 적대적인 권력과 조직적인 안티 공세 때문이라는 주장은 과거의 영향력이 군부정권과 타협 때문이었다는 주장 만큼이나 일면적”이라고 비판했다.

전 기자는 “언젠가부터 조선일보는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안다는 비아냥이 일반화됐다. 더 심한 경우엔 뭘 어떻게 쓸지 안다고 장담한다”고 꼬집으며, 사설이나 칼럼에서 주장이나 이념을 추상같이 쏟아놓으려며 "일반 지면이 공평무사한 사실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기자는 “돌이켜보면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해야겠다는 의욕과 비전을 제시해야겠다는 집착이 반감을 자초한 면이 있다”며 “적어도 독자 위에 계몽군주연하며 군림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은 버릴게 없다”고 충고했다.

조선일보의 과거문제에 대해  전 기자는 “광풍처럼 불어대는 작금의 친일·반민주 처단 몰이에 대해서는 반대지만, 성역없는 비판을 소명으로 삼는 정론지라면, 스스로 나라를 대표하는 ‘할말은 한다’는 신문이라면, 자신에게 더 엄정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전 기자는 조선일보의 사내 토론문화 부재에 대해 “국장회의나 ‘6층회의’(임원회의)에서 나온 말은 삽시간에 퍼져도 사회 현안에 대한 선후배 동료기자의 생각에 대해서는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며 "‘조이’(2층휴게실)나 ‘OB라운지’에서 ‘뒷다마’(험담)나 가십거리는 난무하지만 회의나 노조 지면 같은 데서는 공론을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전병근 기자가 조선 노보에 기고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라는 글 전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

◆입사7년차의 안타까움

입사 후 신선한 충격에 기뻐했던 적이 몇 번 있다. 97년말 굴러다니던 노보를 집어든 때였다. 주필과 한 ‘후배’ 기자간의 ‘공방’이 지상중계되고 있었다. 그 중 ‘후배’의 글 한 대목: 내가 물러나야 할 때가 되면 조용히 다가와 이제 그만두라고 말해주는 후배가 있었으면 한다. ‘이런 진솔한 대화와 각오가 지금의 조선일보를 있게 했구나’. 맘속으로, 조선일보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그 다음해. ‘최장집 교수 사건’으로 술렁일 때였다. 사장께서 ‘가장 최근까지 대학에 있었던’ 막내 기수인 우리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 무렵 지면엔 ‘조선일보 이의 있다’ 시리즈가 연재됐고, 필진에 한겨레신문 사장도 있었다. 조선일보란 고목은 나이테와 함께 반경을 넓혀가는 거목인 줄 알았다.

지금. 링 구석에 몰려 쏟아지는 잽에 머리를 파묻고 더킹만 하다가 롱훅을 휘두르는 공룡 한 마리를 본다. 일전 보수진영의 지리멸렬을 참다 못해 정당 일에 나선 이문열씨가 스스로 ‘잠수함 속 토끼’라 토로한 적이 있지만, 지금 자판을 마주한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다. 진작부터 “임금님은 벌거숭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 침몰하는 어느 당 얘기도 아니고, 거창한 보수위기론도 아니다. 내 젊은 꿈이 터잡은 곳의 이야기다. 이렇게나마 비장한 어투로 말문 열게 한 것은 그나마 선배가 터준 물꼬 덕분이다.

◆‘보수이념 생산과 중심찾기론’의 문제점

이 선배는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해야 할 보수 지식인과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갈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제 그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중심에서 밀린 이유가 “사회적 변화에 둔감”했기 때문이라며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서는 이런 흐름을 정확히 알고 거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됐는데도 우리의 의식과 행동은 여전히 지난날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도 개탄했다. 여기까지는 동의한다. 그러나 선배의 글은 스스로 내세운 진단의 날을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중심에서 밀리고 있다는 진단은 옳게 내리면서 해법은 구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새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하고’ ‘민족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정당발기문 같은 호소부터 보자. 과거 외세에 주권을 빼앗겼던 시절 민족지가 정부를 대신한 때가 있었다. 독재 치하에서 민권이 유린당하던 시절엔 언론이 자유수호의 기치를 들었다. 신문은 무지몽매를 타파하기도 했고 산업화와 (초기)정보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태극기 휘날리며’류의 패러다임이 주효할까. 굳이 ‘현대 미디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문이 ‘이념을 만들고’, ‘나라와 민족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언은 과잉이다.
선배가 말하는 우리사회의 ‘좌편향’에 대한 우려는 나 역시 떨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신문이 ‘보수이념’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중심에 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면에는 비전과 이념과 의욕이 넘쳐났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다매체시대의 도래라는 환경 탓도 있다. 음모론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영향력 실추가 적대적인 권력과 조직적인 안티 공세 때문이라는 주장은 과거의 영향력이 군부정권과 타협 때문이었다는 주장만큼이나 일면적이다. 눈이 있다면 우리 안의 ‘수술 부위’를 찾아야 한다.

◆사실보도와 의견논평의 구분

기본부터 분명히 하자. 저널리즘의 원칙에 더 충실해야 한다. 사설·칼럼이 실리는 의견란과 기사보도 지면간의 구분 말이다. 신문의 정체성이나 할 말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사설이나 칼럼에서 추상같이 쏟아놓으면 된다. 그럴수록 일반 지면은 공평무사한 사실로 채워져야 한다. 언젠가부터 조선일보는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안다는 비아냥이 일반화됐다. 더 심한 경우엔 뭘 어떻게 쓸지 안 봐도 안다고 장담한다. 이럴진대 1단 기사의 팩트 하나에 밤을 새는 후배기자들의 수고와 보람은 무슨 소용인가. 사실-가치의 불가분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접자. 둘 사이의 경계는 양식있는 독자가 더 잘 안다. 나부터도 여러 신문을 봐야 ‘전모’가 들어온다. 보수지의 품격은 보수이념을 그득 담는다고 돋보이는 게 아니다. 경박한 ‘진보’가 따라올 수 없는 냉철함과 치밀함에 있다고 믿는다. 앞서 ‘과잉 의욕’을 경계했던 것도 순금같아야 할 사실보도에 치명적인 앙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피니언란도 입맛에 맞는 것들을 취사선택해 담고는 덮어버리는 뚜껑이 아니라 싱싱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넉넉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편집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의견의 경쟁’을 통해 우리가 믿는 사회적 진리(정론)가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존 밀턴 이후 언론자유론의 첫번째 신조가 아닌가.
하나의 고압적인 목소리나 듣기편한 단일화음이 아니라 소란스런 논쟁이 불을 뿜어야 한다. 우리가 교문 앞의 선도반장마냥 팔짱끼고 있는 동안 재능있는 적잖은 필진들이 다른 멍석을 찾아 나섰다. 영향력은 중심에 서서 발을 굴린다고 나오지 않는다. 정련된 여론의 흐름을 제대로 담아내는 가운데 그 사회의 다양한 뜻과 문제의식들을 모셔와야 한다. 그리하여 안티도 조선의 지면만큼은 들춰보도록 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해야겠다는 의욕과 비전을 제시해야겠다는 집착이 반감을 자초한 면이 있다. 연초 임지현 교수도 ‘정론 콤플렉스’를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의 ‘정론’ 무용론에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독자 위에 계몽군주연하며 군림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은 버릴 게 없다. 독자들의 의식이나 사회 각 분야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성숙돼 있다.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이다.

조선일보의 84년 역사에 빛나는 부분은 과거 사주들이 당대의 지식인과 인재를 중히 여겼다는 전통이다. 그 미덕은 어디로 갔는가. 어느새 우리는 우리 사회의 지성 위에 매니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세간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일보용 논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불순한 ‘낙인찍기’ 혐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만큼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미래로 나가기 위한 과거 성찰

안티 세력의 ‘전면부정’이 ‘비역사적’이라는 선배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의 여론이 안티의 선동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시선은 그들 뒷편으로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관객들에게 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反안티(혹은 보수)-非조선층 말이다. 보수지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는 경쟁지가 비집고 들어오는 틈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선배는 조선일보의 과거 문제에 대해 “가장 오래 살아오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개의 혹을 달게 됐다”고 표현했다. 그중에는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고, 터무니 없고 억울한 것도 있다”고 했다. 충분히 짐작은 간다. 그러나 “거추장스런 혹들을 하나씩 떼어버려야 하는” 시점이라고 하면서, 혹을 떼는 방안에 대해서는 입을 닫은 채, “또 다른 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만 했다. 광풍처럼 불어대는 작금의 ‘친일·반민주 처단’ 몰이에 대해서는 나도 반대다. 다만 묻고 싶다. 성역없는 비판을 소명으로 삼는 정론지라면, 스스로 나라를 대표하는 ‘할말은 한다’는 신문이라면, 자신에게 더 엄정해야 하지 않을까?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비슷한 과거사를 두고 매년 다른 행색을 보이는 일본과 독일의 예를 보자. 사과 한마디에도 옹색한 일본과 지나치리만큼 반성을 표시하는 독일 두나라를 놓고 우리는 누구를 대국이라 말하는가. 겸허함의 힘이라는 그런 것이다. 독일인들 할 말이 왜 없겠는가. 반면에 일반 국민들이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할 때 우린 잘난 점만을 과시하고 스스로 ‘면죄부’ 삼으려 했다. 이미 ‘유감’은 충분히 표시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런 미온적인 자세가 오늘날 안티의 득세, 그것도 다름아닌 그들의 ‘도덕적 우위’를 호인토록 한 것은 아닌가 내 몸 안의 ‘혹’을 두고 별거 아니니 이젠 잊자고 하는 태도가 그것을 암덩이로 키워온 것은 아닌가. 그 결과 의도조차 불순한 집도의기 휘두르는 메스에 몸을 맡기게 될 날만을 기다리게 된 것은 아닌가. 시대가 바뀌었으나 순응하자는 말이 아니다. 불변이어야 할 정론직필의 태도를 시종 안팎에서 견지하자는 말이다.

◆언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한가

바라건데 문어발식 이벤트나 사업으로 사세를 과시하거나 영향력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으면 한다. 외국 유수 언론의 지면에서 우리만큼 다양하고 대대적인 사업 광고는 본적이 없다. 우리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에 눈을 돌리는 것은 꾸준히 실리는 공정보도와 고급논평 때문이다. 미국이라고 각종 사업 소재가 없겠는가. 언론은 다양한 사회적 책무와 기능을 맡고 있는 정부와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하는를 감시하고 비판함으로써 겨로가적으로 그런 사회적 기능을 지원한다. 우리는 어느틈엔가 ‘작은 정부’를 참칭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신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독주의 징후를 드러낸다.

한국적인 언론환경, 가령 여타 사회 기제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거는 언론에 대한 유별난 기대 같은 것, 그에 따른 경영전략을 말한다면, 이제 서서히 우리 사회는 그 정도의 단계는 지나지 않았나 하는 정도로만 말을 맺겠다. 경영차원의 결정을 존중하고픈 기자로서 정작 이 말을 꺼낸 것은 우리가 그만한 노력을 지면 개선이나 회사 조직 개선에 투자하고 있는가 묻고 싶어서다.
이렇게 말하면 또 사람을 더 뽑자는 말이냐고 다그칠지 모르겠다. 단순히 그런 양의 차원만이 아니다. 도처에 널린 주먹구구 시스템 때문이다. 벼락치기 기획의 관행은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니다. 징발식 충원으로 태스크포스팀만 짜놓으면 어떻게든 물건은 나온다는 식의 밀어붙이기 경향은 여전하다. 겉보기에 요란한 포장지가 아니라 내용물의 품질을 꼼꼼히 따져보는 독자시대다.

정보화 시대로 갈수록 경쟁지들과의 상품의 차별성은 사안별로 두드러진다. 가령 한 경쟁지는 과학면에 관한 한 우리보다는 한 수 위다. 또 다른 경쟁지는 각종 취재팀 가동 양상이 지면에서도 보일 만큼 조직적이고, 유기적이다. 특파원 체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한국의 대표신문으로 생각하겠는가. 행여 판매부수 1위를 내세우려는가? 그렇다면 왜 굳이 요미우리가 아닌 아사히를 표방하는가?
그 숫자 논리만 해도 그렇다. ‘1등 수성’을 자랑하는 것은 힘든 시기에 일견 대견해할 만하다. 하지만 더이상 확장(성장)이 아니라 제자리를 답습하는데 대한 문제의식은 왜 없는가. 힘든 시기는 똑같이 겪고 있다. 행여 열혈 독자들의 충성에 기대어 우리의 관성을 고집해온 것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이 선배(이선민 기자)가 제안한 ‘장기발전전략팀’ 구성은 빠를 수록 좋다.

◆현실 개선으로 이어지는 토론활성화를 바라며

사내에 토론문화가 보다 활성화돼야 한다는 말은 이미 제풀에 사그러든지 오래다. 문제는 왜 달라진 게 없느냐는 것이다. 그 책임과 역할의 부담은 위로 올라갈수록 크다고생각한다. 상급자의 일방통행식 발언이 반복되다 보면 아랫사람은 입을 닫게 되고 상향식 의견개진이 무반응으로 일관되면 편집국은 공동묘지가 된다. ‘국장회의’나 ‘6층회의’(임원회의)에서 나온 말은 삽시간에 퍼져도 사회 현안에 대한 선후배 동료기자의 생각에 대해서는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 ‘조이’(2층휴게실)나 ‘OB라운지’에서 ‘뒷다마’(험담)나 가십거리는 난무하지만 회의나 노조 지면 같은 데서는 공론을 찾기 힘들다

지금 ‘대화가 부족해’란 노래를 리메이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으로 치자면 공허한 메타이론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대화의 내용에 해당하는 건설적인 의제가 제시되고 그에 대한 비판과 의견수렴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선배의 문제 제기는 우리 모두의 ‘터전 가꾸기’를 위한 첫삽뜨기로 제 몫을 했다.
끝으로 노보의 지상논쟁이 ‘담론 싸움’으로 끝나는 것을 경계한다. 점진적인 지면변화와 이를 위한 조직 개선으로 이어지는 실익있는 토론이었으면 한다는 말이다. 이 시대 유능한 토론꾼‘은 대통령 한 명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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