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군 사건' 조선일보 허위보도에 대한 논란을 무장공비 사건이 발생한 1968년 12월9일부터 2004년 1월29일 항소심 선고공판 연기까지를 일지로 정리했다.

▲1968년 12월 9일 밤.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한 무장공비 5명이 강원도 평창의 한 산골 오지 마을에 숨어 들어갔다. 무장공비들은 한 민가에 들어가 어머니 주대하(33)씨, 차남 승복(10)군, 3남 승수(7)군, 4녀 승녀(4)양을 살해하고 아버지 이석우(35)씨, 장남 승권(15, 호적상 이름은 '학관')군에게 중상을 입힌 채 의복과 식량을 챙겨 도주했다.

기자들이 현장에 달려온 시간은 10일 낮. 이미 승복군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고 유일한 생존자인 승복군의 형 학관씨(당시 이름은 승원)는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현장에 갔던 기자들은 이미 참사주변이 정리돼 있었고 군인들이 주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개요 외에는 달리 취재할만한 내용도 대상인물도 없었다.

▲사건 발생 이틀 뒤인 1968년 12월 11일. 대다수 신문들이 관련 소식을 전했지만, 조선일보만 유일하게 승복 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며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보도했다. 아래는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항거 입찢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조선일보 기사 내용.
 
(전략)…장남 승원군에 의하면…강냉이를 먹은 공비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 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열 살난 2남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 중 1명이 승복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 계속해서 주 여인을 비롯한 나머지 세 자녀를 모두 끌고 나가 10여m 떨어진 퇴비더미까지 갔다.

공비들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벽돌만한 돌멩이로 어머니 주여인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현장에서 숨지게 했으며 승복 어린이에게는 "입버릇을 고쳐 주겠다"면서 양손가락을 입 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후략)

▲이승복 사건이 발생한지 24년이 되던 1992년 미디어오늘 김종배 전 편집국장(당시 언론노보 기자)이 한국기자협회에서 발간하는 <저널리즘> 가을호에 당시 조선일보 보도가 조작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김 전 국장은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는 제목의 글에서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장남 학관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학관씨는 동생 승복 군이 살해된 후부터 원주에 있는 병원에 후송되기까지 당시 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김 전 국장은 이를 근거로 조선일보 기사의 취재원이 학관 씨였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일보 보도가 작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이 글이 조선일보와 김 전 국장·전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주언 사무총장(현 한국언론재단 이사) 간에 벌어진 법정공방의 시발이 됐다.  

▲98년 8월.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조선일보 이승복 군 허위보도' 등 50대 허위·왜곡보도를 선정, 발표했다. 언개연이 선정한 오보 50선은 중앙일보의 15대 대선 보도, 서울신문의 이승만 전 대통령 숭배 사설, 경향신문의 김평일 망명설 보도, 동아일보의 호랑이 출몰 사진, 제주신문의 선거유세장 인파 조작 등이었다.

당시 언개연은 △체제 옹호와 민주화 외면 △냉전 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 △민중생존권 외면 △선정주의 △언론사 이기주의 등 5가지 유형별로 허위왜곡보도를 분류했다. 언개연은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허위 왜곡보도 50선’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언개연의 '오보 50선' 선정으로 6년 전 김 전 국장이 제기한 작문 의혹이 다시 수면로 떠오르자 조선일보는 98년 9월 28일부터 반박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자사 지면과 <월간조선> 10월호를 통해 '승원'을 '승권'으로 오기한 사실과 취재원이 학관 씨가 아니었다는 등은 잘못됐다고 인정했지만 작문은 절대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당시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학관씨는 중상을 입고 마을을 내려오다가 친척관계에 있던 근처 이석연(사망)씨 집에 들러 그의 부인 최순옥 씨에게 승복 군의 죽음에 대해 얘기했으며 최순옥 씨가 다시 이튿날 아침 사건 현장에서 입이 찢어진 시체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군인 장교에게 승복군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월간조선>은 이를 근거로 이학관씨-최순옥씨-군인 장교(미확인)-주변 사람들(미확인)을 통해 조선일보 취재기자 강인원씨에게 승복 군의 얘기가 전달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해 11월 조선일보는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현 한국언론재단 이사)과 미디어오늘 김종배 전 편집국장을 상대로 각각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2002년 9월 3일. 서울지법 형사9단독 박태동 부장판사는 이승복 사건 오보 논란과 관련 해 지난 99년 조선일보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주언 전 사무총장과 김종배 전 편집국장에게 각각 징역 6월,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변호인측은 같은 날 곧바로 항소를 제기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김주언(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98년 8월과 9월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연 오보 전시회를 통해 이승복군이 하지도 않은 말을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취재도 없이 임의로 만들어 기사화 했다고 주장했고, 또 미디어오늘 김종배 전 편집국장은 92년 가을 ‘저널리즘’에 이승복군의 신화가 조작됐다는 글을 기고했으나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과 현장취재 사진으로 보아 이를 증명키 어렵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언개연은 법원의 판결 직후 즉각 유감논평을 내는 한편 시민단체들은 공동대책위 구성에 나서기도 했다. 이승복 작문 논란을 둘러싼 언론사들의 공방도 치열했다. 조선일보는 연일 본지·사보·사외보 등을 통해 “왜곡될 뻔했던 ‘사실’이 결국 지켜졌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이에 반해 한겨레는 9월 5일자 사설에서 "이승복군 발언 보도가 ‘작문’이고 조선 기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지적은 30여년간 언론계에선 ‘정설’처럼 여겨왔다"고 지적했다.

▲2004년 1월 29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형사항소 9부(부장 구만회)는 "판결을 내리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어 심리를 재개키로 했다. 오는 3월 2일 오전 10시 심리를 재개하겠다"고 밝혀 항소심 선고공판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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